※ 중요한 자료 내용을 끝까지 잘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제목 [족보와 역사]은나라 마지막 왕과 임씨 가문 (황우석 토론)
[족보와 역사] 은나라 마지막 왕과 임씨 가문
(필자 첨언)각 성씨마다 그 뿌리가 있으며 특정 성씨를 칭찬하는 자리가 아니며 필자의 성씨가 임씨(평택)라 해서 여기에 기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모든 각 성씨의 뿌리는 중국에서 비롯되지만
중국은 원 동이족 무대가 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 본토 화하족은 원래 중국 본토에 살았던 것이 아닌 중국 서남부에 살았던 원시 종족이다. 현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지방 왕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은나라 말기에 천황의 왕자에서 충언을 거듭하다 비참하게 죽은 3대 성인이자 충신인 임씨의 뿌리를 적은 것이다. 임씨를 가진 분은 참고 바라며...(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님이 진씨이고 필자가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 온 것과 주장을 굽하지 않는 것... 닮은꼴이 많습니다. 프랙탈의 모양을 살았던 것으로 기억되어 내심 놀라운 마음입니다.)
각자 자기 성씨의 뿌리를 찾아보기 바라며.. 여기에 올리셔도 됩니다. 이하 자료는 편집한 것입니다.
(자료 편집)은나라 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폭군 주왕紂王은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하였다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문헌과 표현방법에 따라 비간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자 또는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라고 되어있다.
왕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왕의 숙부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간]은 29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태정제의 맏아들은 30대 을제(乙帝)가 되었다. 아마도 [林氏先祖寶鑑]에서 비간을 '마지막 왕자'라고 표현한 것은 을제(乙帝)를 이어 받은
마지막 주왕紂王이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나라를 망치고 무수한
충신들을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왕통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은나라 '마지막 왕자 비간'이 순국하자 비간의 부인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 석실에 피신하여 그 후에 아들을 낳으니 처음 이름을 泉이라고 지었는데 泉의 나이 3세때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가 건국되자, 주의 무왕武王이 그 혈통을 찾아 장림산의 '림'을 따서 林氏를 사성賜姓하였고 굳굳하게 성장할 것을 뜻하여 '견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비간의 능陵은 현재 중국의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에 있으며 그 후손들이 춘추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친 동생이다.<단군세기>는 당시 기자가 나라를 잃은 왕족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남성 서화西華라는 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일에 기자가 조선의 왕으로 책봉되었다는 것은 고조선 전체
왕이 아닌 지방호족의 왕이거나 후일에 가필되어 과장되었을 것이다.
비간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대손]으로 아래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수풀림林 한국종친대종회에서 발간한 임씨 선조보감林氏先祖寶鑑에 수록되어 있는 '林氏의 源流를 찾아서'에서 발췌한 것이다.『이땅의 임씨林氏는 득성得姓 이후 3천 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고대 중국 땅에서 2천년을, 그리고 한국에서 천 백여년
동안 조상님들의 맥이 이어져 왔다고 하겠다. 중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은殷나라 마지막 왕자王子이신 비간(比干 : 3090년전)공을 꼽을 것이다. 이분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세 후손이시며 그 당시 은나라 3인(비간比干, 기자箕子, 미자微子)중 한분이시다. 중국 정부에서 옛날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三仁祠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득성임씨得姓林氏는 비간공의 아드님이신 임견林堅공이신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임견공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견고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버님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라 칭한다. 득성시조 임견공으로 부터 우리나라 임씨를 살펴보자. 득성조로 부터 중국 땅에서 2천년을 이어왔고, 그간에 많은 선조님들이 중국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중 몇 분을 소개하면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큰손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공이 계시다. 이어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이 계신데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분의 고손高孫인 임팔급 林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 중 변방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중국의 팽성으로 부터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략- 』
아래는 임씨한국종친회 각 본관 대표들이 선조 제향참례를 위해 중국에 직접 방문하여 중국, 대만 등 세계의 종친회원들을 만났을 때의 기행문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지난 1995년에 중국의 제향참례 및 조상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2회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 있게 입장하여 제향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의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결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시장.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위휘시 목야牧野에 장림산長林山이 있는데 이곳은 임견공 출생지로서 석굴에는 출생한 견堅공을 안고 있는 어머니 진씨陳氏의 상이 있고, 큰 글씨로[林堅出生地]란 안내석이 있었으며, 큰 비碑에는 황제黃帝(황제헌원)로부터 내려온 내력과 득성得姓하게된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옛일을 한 눈에 회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으로 하남성 안양에 있는 은허지殷墟趾를 찾았는데 은나라 왕궁으로서 비간공 이전에 계셨던 조상님들의 왕궁인 것이며 고색이 짙은 상형문자와 갑골문자로 치장해 놓았는데 보존이 잘되어 있었고 조상님들이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태시조 비간공으로부터 현존하고 있는 상고대 조상님들과 팔급八及공이 사시던 집까지 찾았으니 팔급공의 계대 연결은 적중한 것이다. 우리 임씨는 황제헌원으로부터 32대 은나라 마지막 왕자인 비간比干공을 태시조太始祖로, 이분의 아들인 임견공(BC 1121)을 원시조로, 동도東渡하신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여 뿌리가 확실하게 어어진 것이다.(…) 팔급공과 그 일행이 신라국 아산만에 정착하면서 토성을 쌓고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팽성彭城이란 팔급공의 고향 지명을 불러 팽성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중국 당나라 성주의 고관 후손이요, 한림학사 병부시랑이란 막중한 벼슬이었던 팔급공이 토성에 사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최근 1988년 수원대학에 의해 팽성에 있는 농성濃城에 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던 바 팽성임씨彭城林氏(본관 평택임씨를 말함) 시조 팔급공이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고, 현재 평택시에서 이 농성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또한 이 곳 지명을 팔급공의 고향故鄕 지명인 팽성彭城으로 지어 불러온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 평택시 팽성읍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팔급공은 이곳에서도 외침을 막는데 분투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한국에 있는 임씨는 기원전 1121년에 득성하여 중국에서 2000년을, 그리고 대개가 1100여년 전에 동도하신 임팔급공의 후손들이다. 관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우리 林氏는 한 할아버지(비간)의 자손임이 분명하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1999년 현재 세계에 퍼진 임씨종친의 인구수가 약 7천만명인데 중국대륙에 6천만명정도가 살고 있으며 중국외의 전 세계 곳곳에 1천만명이 살고 있고 그 1천만명 중에서 우리나라에 약 1백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林氏先祖寶鑑의 내용대로라면 전 세계의 수풀林을 쓰는 사람들은 시조가 한분이며 그분은 고대 은나라 말 三仁중 한 사람인 비간比干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기자箕子의 조선朝鮮 망명설과 관련, 비교 연구의 여지가 있을듯하여 임윤화林允華 대법사의 축간사祝刊辭를 인용해 본다.『…우리 林氏 조상의 원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林氏 太始祖 비간공은 순국하시고, 그 동생 기자箕子는 해동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 태조대왕이 되시고, 미자微子왕자는 국외로 추방되었던 것입니다. 비간공의 부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 석실에 피난하여 아들을 낳으니 子 천泉 이었던 것입니다. 3세시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長林山의 林을따서 임씨로 사성賜姓하고 원래의 이름인 천泉을 견堅으로 하여 임견공이 수풀림의 득성시조가 되셨습니다…』
옮겨온 글 (황우석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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