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객령공계 대종회/대 종 회

갈곡선생 행장(葛谷先生 行狀)

임홍규 2010. 9. 27. 17:21

 

 

갈곡선생 행장

(葛谷先生 行狀)

 

우리 동방(東方) 임씨(林氏)의 선조(先祖)는 팽성백(彭城伯) 휘 팔급(八及)공 이시니 일찍이 중국(中國)으로부터 동(東)으로 오신 분이시다.

고대(古代) 은(殷)나라 말엽에는 어진 선비와 명신(名臣)들이 위연(蔚然: 무성하다)이 대(世)를 이어오면서 부조(父祖)의 가업(家業)을 이어왔다. 시조(始祖) 공의 동도(東渡) 후로 우리 임씨(林氏)는 아득히 신라(新羅)에서 고려(高麗)에 이르는 동안 천여년(千餘年)에 걸쳐 묘예(苗裔:자손)가 번창하고 관면(冠冕:벼슬)을 이어오면서 파파(派派)로 나누고 갈라지어 그 실수(實數)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세자 전객령 휘 세춘(世春)공을 일세(一世)로 우리 종문(宗門)의 파조(派祖)가 되시니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공의 휘는 수겸(守謙)이시니 천성(天性)이 착하고 총명재지(聰明才智)가 초범(超凡)하시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시더니 성장하시면서 부모 섬김을 효(孝)로써 하고 부모의 명교(命敎)를 추호도 어긴바 없으며 정성(定省 : 조석문안)을 궐(闕)하지 않고 혹 밖에 나가 놀때에도 꼭 시간을 지키심은 부모께서 기다리시는 마음을 들어 드림이며 무릇 부모의 소욕(所欲)을 다 받들지 아니함이 없었다. 더욱 칭송(稱頌)할 일은 부지런하고 검소(儉素)하여 화사(華奢)하지 않고 신역(身役)이 되는 일에도 형색(形色)하지 않고 여가(餘暇)가 있으면 학문에 정진(精進)하시고 친지(親志)를 기쁘게 하여 드리며 동네 어른들을 부모같이 공경하고 또한 어린이를 내 자식 같이 사랑하고 이웃간에 화목하며 어려운 일에는 상부상휼(相扶相恤)하시니 온 마을 사람은 그 효덕(孝德)과 가행(嘉行)에 감탄하며 존경한다.

또한 부모께서 환후(患候)가 계시면 잠시도 시측(侍側)을 떠나지 않고 의대(衣帶)를 풀지 않으시며 탕약(湯藥)에는 반드시 먼저 맛 본 후에 드리는 등 고금(古今)에 걸쳐 효사(孝事)를 논(論)한다면 왕상(王祥)의 이어(鯉魚)나 맹종(孟宗)의 댓순(竹筍)에 견주어 괴색(愧色)은 없어리라.

十五세에 남학(南學 : 정주학(程朱學)에 입학하고 十七세에 중학(中學)에 입학하여 직제학(直提學) 김공 문(金公 汶)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하던 중 김공(金公)께서 친상(親喪)을 당하여 적성(積誠) 지방에 계신지라 공(葛谷先祖 : 갈곡선친)께서는 배움의 열의(熱意)에서 二, 三학도(學徒)와 더불어 책상을 짊어지고(負岌) 스승을 좇아 소학(小學) 대학(大學) 시전(詩傳) 주역(周易)을 배우고 마침내 학업(學業)을 대성(大成)하니 정주학(程朱學)의 종장(宗匠)이 되시다.

二十세가 되던 임자(壬子)년에 사마(司馬)에 이르고 갑인(甲寅)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니 본래 타고난 효성(孝誠)에 풍수(風樹)의 한(恨)을 어떻게 감내(堪耐)하였으리요.

초종범백(初終凡百 : 장례의 절차)에 유감없이 하고 삼년간(三年間) 시묘(侍墓) 중에도 마음은 항상 어머니 봉양에 있으면서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시니 그 성명(聲名)은 널리 경향간(京鄕間)에 소문나다.

그 후 용인유학교도(龍仁儒學校導)로 선임되니 용인(龍仁)은 공의 선친(先親) 산소(山所)가 계신 곳이다. 세종(世宗) 二十九년에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하여 사유(師儒)로써 벼슬이 사예(司藝)에 천거되고 경진(庚辰)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후 복제(服制)를 마치고 학관(學官)으로써 승문원(承文院)에서 집무(執務)하시다.

때는 나라가 태평하고 국내(國內)가 무산한지라 임금께서 문학에 예의(銳意)하시어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경술(經術 : 유교의 바탕에 기본하여 얻은 정치상의 경륜)을 익히고 경의(經義 : 경서의 뜻)를 강론(講論)할새 세조(世祖) 十二년 병술(丙戌) 六월에 공께서는 최지(崔池) 손차면(孫次綿). 표영중(表永中). 김 구(金 龜). 이숙문(李淑文). 정효종(鄭孝終). 김구지(金懼知). 유사덕(劉思德) 등 제신(諸臣)들과 더불어 부름을 받고 강녕전(康寧殿)에 이르니 임금께서 무극(无極) 태극(太極)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묘리(妙理)에 대하여 물으시다.

이에 배석(陪席)한 제신(諸臣)들은 답변이 궁하여 난색(難色)한 표정으로 서로 바라볼 뿐이다. 이때 공께서 일일이 반복하여 대답하시다. 임금께서 재삼 힐문하시니 공은 또한 대답에 막힘이 없이 무릇 세 차례를 편전(便殿)을 대(對)하시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시고 공에게 곧 성균사성(成均司成)을 제수하시니 당시 사람들은 그 모임의 융성(隆盛)함과 서로 얻음의 심오(深奧)함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부터 공은 임금과의 문답(問答) 내용을 소대록(召對錄)에 기록하여 행세(行世)에 자료(資料)로 하시다.

공은 일찍이 전라좌도관찰사(全羅左道觀察使). 예조참의(禮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의 벼슬을 지내는 동안 성명(聖明)을 입어 광영(光榮)된 세월을 지내왔으나 본시 영욕(榮辱)에 뜻이 없어 임천(林泉)에 묻혀 양성사천(養性事天 : 修道)하면서 고요한 삶을 추구(追求)하여 매번 인퇴(引退)를 도모하다가 이미 신창(新昌) 도고산(道高山) 아래에 퇴휴(退休 : 물러가 쉬다)하여 도(道)를 닦으면서 진세(塵世)의 번뇌(煩惱)에서 벗어날까 하였더니 성종(成宗) 二년에 유일(遺逸 : 유능한 인물이 등용하지 않고 세상을 숨어 살다)을 들어 공을 천거(薦擧)하다.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임금은 공으로 하여금 경명행수(經明行修 : 경학을 밝히고 행실을 닦다)에 모든 선비들의 사표(師表 : 스승)에 합당함으로 은퇴함은 불가하다 하시고 칙서(勅書)를 보내어 불러들이므로 내전(內殿)에 드시니 우선 치도(治道)의 방편과 민생의 질고(疾苦)를 자문(諮問)하시니 공께서는 먼저 성의를 다하여 마음을 바로 하는 요결(要訣)과 때에 미치는 폐단(弊端) 수십조(數十條)를 수선(首先)으로 진술하시고 또한 오늘에 이르러 학교를 다스리지 않아 사도(師道)가 불명하며 사습(士習)이 투폐(偸弊 : 目前의 안일만을 추구함)하여 인재(人材)가 낳지 않으니 원하옵건대 덕업(德業)에 충비(充備)한 자를 찾아 태학(太學)의 스승으로 삼고 다음으로 일국(一國)의 선비들로 하여금 교육을 분담 실시하면 풍속이 바로 잡히고 태평을 가져오리라 하고 호안정(胡安定). 정명도(程明道) 두 선생의 이미 시행하여 효험(效驗)을 거둔 법을 들어 반복 논달(論達)하며 누누이 말씀하시니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수(守 : 직급을 초월한 人事) 동지 성균관사(同知 成均館事)에 제수하시고 주자(冑子:공경대부의 자제질)의 교육을 명(命)하시니 때에 서공거정(徐公居正)이 성균(成均)의 장(長)으로써 공과 같이 사석(師席 : 스승의 자리)을 맡으시다.

공의 논의(論議)가 탁월초매(卓越超邁)함을 보고 감탄하여 일찍이 공의 유서(諭書 : 임금에 보낸 칙서)에 서(序)를 달되 훗날 수년간 갈고 닦으면 인재배출(人材輩出)에 있어 문명(文明)의 치화(治化)에 크게 보탬이 있으리라 하고 공의 유서(諭書) 일축(一)을 장체(粧楴)하니 일시에 문장거공(文章巨公)이 글과 시문(詩文)으로 찬양하니 서거정 김수온(金守溫). 강희맹(姜希孟). 성 현(成 賢). 채 수(蔡 壽). 손순효(孫舜孝). 이승소(李承召). 성 임(成 任) 제공과 같은 경상(卿相)들과 치덕(齒德)이 가장 높아 그 존경(尊敬)함을 후생(後生)이 선배장자(先輩長者)를 대(對)하듯이 존칭(尊稱)하니 이에 공의 덕업(德業)의 존엄(尊嚴)함과 인망(人望)의 중대함을 보고 인하여 숭유중도지미(崇儒重道之美)와 당시 공경대부(公卿大夫)에 대한 존현호덕지풍화(尊賢好德之風化)가 미치리라 하시다.

후록(後錄)에 조상국익(趙相國翼)이 또한 말미(末尾)에 전말(顚末)을 기록하다. 공은 일찍이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김공문(金公汶)에서 배우고, 김공은 사예(司藝) 이공양명(李公陽明)에서 배우고, 이공은 목은(牧隱). 포은(圃隱). 도은(陶隱)의 문하(門下)에서 교유(交遊)하여 연원(淵源)의 자연적 계통이 있었음이라. 공은 타고나신 자태(姿態)가 고명(高明)하시어 크고 넓은 기량(器量)을 지니시어 아이들과 놀이에도 예법을 좇아 일찍이 유희(遊戱)에 동대(同隊)하지 않고 날마다 독서(讀書)로써 업무를 삼아 문학을 흥기(興起)시켜 군민(君民)의 혜택(惠澤)을 이루고 재가시(在家時)에는 효우돈목(孝友敦睦)하여 만당(滿堂)에 화기(和氣)가 돌고 일실(一室)이 단란(團欒)한 바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이었으리라.어머니 성품이 엄숙하고 법도가 있어 부인(夫人)의 도리를 다하시면서 공에 대한 교양을 의방(義方)으로써 하니 공 또한 어머니의 뜻을 본받아 그 교훈을 좇아 자직(子職)을 다하시니 어머니 일찍이 손을 모아 하늘에 고(告)하여 가로되 효자(孝子)로다 하시다. 형제제질(兄弟諸姪)을 지극히 은혜(恩惠)하여 전장(田庄)을 균일하게 분배하여 차등(差等)이 없이 하시며 혹 불만이 있어 험담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지성(至誠)으로 친애(親愛)하여 추호도 형색(形色)함이 없이 한결같이 양보하니 이에 감화(感化)하고 회심(回心)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없더라 조정(朝廷)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군심(君心)을 바로하고 민폐(民弊)를 개혁(改革)하고 학교를 일으켜 치정(治政)의 대본(大本)으로 삼을 것을 간간히 진달하신 횟수만도 전후 몇만 말씀을 하신지 알지 못할 정도이다.

성종조(成宗朝)에 이르러 교화(敎化)를 밝히고 태평(泰平)을 이르켜 널리 유일(遺逸)을 조치(招致)하여 군현(群賢)을 예대(禮待)하니 빛에 가리웠던 화사(華奢)한 선비들이 출사(出仕)의 기쁨을 안고 우우(于于 : 만족한 모습)이 올 때 공을 수선(首先)으로 부르심에 지우(知遇 : 재능을 알아주자)에 감격하며 보리승화(補理承化)에 비익(裨益)되는 바 많을 것이니 임금께서 경중이 여기면서 조정의논에서 사유(師儒)의 대표에 첫번째로 공을 추천하시다.

공은 조정에 벼슬한지 五十여년에 몸가짐이 청백하여 추호도 범(犯)한 적이 없어 일찍이 탄핵에 연루(連累)됨이 없었다. 공은 세종조(世宗朝)에 등과(登科)하여 성종조(成宗朝)에 사임하니 육조(六朝 : 여섯왕조)에 걸쳐 지낸 벼슬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며, 그 나타난 벼슬만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공부시랑(工部時郞). 전라좌도관찰사(全羅左道觀察使). 호조참의(戶曹參議).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題學).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수동지성성균관사(守同知成均館事)이니 이는 다행히 관교(官敎 :교지)의 남아있는 부분만을 추린 것이다.

공은 태종(太宗) 九년 기축 十월 十八일에 탄생하시어 성종(成宗) 二十三년 임자 八월 二十三일에 연관(捐館 : 貴人의死亡)하시니 수(壽)는 八十四세라. 공은 도학의 존엄함과 덕망(德望)의 중대함으로 인한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향년(享年)이 이와같이 오래이신 것으로 보아 그 지내신 벼슬이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공은 도(道)를 지키면서 조용함을 좋아하시니 물러가 쉬던 날은 많고 조정(朝廷)에 있던 날은 적으니 위(位)로 인하여 덕(德)을 가득히 못한바 이러므로써이다.

공께서 저술하신 문장(文章)이 많으나 병란(兵亂)으로 잃어 전(傳)하지 못하니 탄식할 일이다. 무릇 사람에 조상(祖上)이 있음은 물과 같아 근원(根源)이 있고 나무와 같아 뿌리가 있어 근원에서 흐르고 흐르면서 나누어 갈수록 요원(遼遠)하며 뿌리에서 가지가 뻗고 가지에서 잎이 피어 생생(生生)하게 번성함이니 만약 고반(考槃 : 조상이 살던 터전)의 청전(靑氈 : 조상이 끼친 유물)과 가승(家乘 : 家史)의 문헌(文獻)이 없으면 어찌 그 파계별소목(派系別昭穆)을 밝힐 수 있으랴.

우리 동방(東方)의 임씨(林氏)는 신라(新羅)에서 고려(高麗)에 이르는 동안 현족(顯族)하여 왔으며 조선조(朝鮮朝) 이래 여러번 혼조(昏朝)를 당하면서 고증(考證)할만한 문헌(文獻)이 소실(燒失)되어 세계(世系)의 선후(先后)가 불명하여 족계(族系)가 상계(上系)이래 정립(定立)된 바가 없어 우리 후손들은 다만 음통(陰通)하고 마음이 답답할 따름이더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서기一九九二년 임신(壬申) 二월에 발족(發足)하여 추진하여 오던 임씨한국종친대종회(林氏韓國宗親大宗會)가 십수년(十數年)에 걸쳐 한국 및 중국(中國) 임씨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고행(苦行)하고 노력한 나머지 다행히 혈통(血統)의 본원(本源)을 찾았음이다. 이에 세자전객령공파(世子典客令公派) 대동보(大同譜) 수단(修單)에 즈음하여 온 일가를 밝히고 계대(繼代)를 바로함이 급선(急先)임을 느끼고 일일이 보완하여 서두(庶頭)의 내용과 같이 서술(敍述)하니 우리 자손된 자 숭조상문(崇祖尙門)에 더욱 힘쓸지어다.

아! 공께서 쌓으신 인덕(仁德)은 본지(本支)가 만세(萬世)에 이어지리니 한 근원이 천파만류(千派萬流)에 통하고 천지만엽(天枝萬葉)이 본시 한 뿌리에서 근원이 됨을 볼 수 있으니 이에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길고 뿌리가 견고하면 잎이 무성함이니 우리 일가(一家)는 이 진리를 찾아 상부상조(相扶相助) 정신을 함양(涵養)할 때 거의 인간(人間)으로서 나아가야 할 도리(道理)를 찾는 행운을 얻을 것임이라.

공의 자(子)는 익지(益之)요, 자호(自號)는 갈곡(葛谷)이며, 신옹(愼翁) 사재(思齋) 고산처사(高山處士)의 호(號)를 가지시다. 배위(配位)는 진주강씨(晉州姜氏) 해주목사(海州牧使) 득호(得浩)의 여식이시다.

어려서부터 부도(婦道)가 있으며, 우귀(于歸 : 시집가다)하신 후에 육남(六男)을 두시니 추(樞). 환(桓). 근(根). 석(檡). 격(格). 집(楫)이라. 장(長)에 추(樞) 봉렬대부(奉列大夫)는 영인(令人) 초계정씨(草溪鄭氏) 판서 지손(智孫)의 여식을 맞아 二남을 두니 자영(自英) 부사직 자화(自華) 생원이며, 차(次)에 환(桓) 통훈대부익산현감(通訓大夫益山縣監)은 숙인(淑人)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 三남을 두니 자양(自煬) 예조판서, 자손(子孫) 음군수 자빈(自彬) 사헌부감찰이며, 차(次)에 근(根) 통정대부순천부사(通政大夫順天府使)는 숙부인(淑夫人) 수원백씨(水原白氏)를 맞아 二남을 두니 춘후(春厚) 감찰, 자량(自良) 호조판서이며, 차(次)에 석(檡) 양천현감(陽川縣監)은 의인(宜人) 전주이씨(全州李氏)를 맞아 一남을 두니 석통(錫統) 공조참판지공주목이며, 차(次)에 격(格) 부사직(副司直)은 의인(宜人) 밀양박씨(密陽朴氏)를 맞아 一남을 두니 자추(自秋) 통덕랑이며, 차(次)에 집(楫) 중사마(中司馬)는 함창김씨(咸昌金氏)를 맞아 三남을 두니 자방(自方). 자후(自垢) 서사. 자무(自茂) 훈렴청정이니 여예(餘裔)는 번창하여 다 기록치 못한다.

 

 

 

十七대손 춘한(春閒) 승숙(承肅)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