恭惠公 歷仕錄(공혜공 역사록)
正憲大夫(정헌대부) 禮曹判書(예조판서) 西北面(서북면) 都 巡問察使 兼(도 순문찰리사 겸)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平壤府尹(평양부윤)永樂(영락)11(1413)年
癸巳(계사) 我祖(아조) 太宗(태종) 恭正大王(공정대왕)13(1415)年 4월28일 在任所捐館(재임서연관) 諡(시)恭惠公(공혜공)
成宗祖(성종조) 選 靑白吏(선 청백리)
配(배) 貞夫人 淸州韓氏(정부인 청주한씨) 父 禮儀判書 光漢(부 예의판서 광한)
墓(묘) 龍仁市 下東村 卯峰洞(용인시 하동촌 묘봉리) 卯坐(계좌) 合(합지)有床石 墓碣(유상석 묘갈)
成宗祖(성종조) 13(1482)年 壬寅 賜牌(년 임인 사패) 山四十里周四(산사십리주사)癸卯立(계묘 립) 神道碑于(신도비간) 墓下(묘하) 三步 許(삼십보 허) 壬亂後(임난후) 碑石埋沒(비석매몰) 尙未搜(상미수)對幾十年後(대기십년후) 竪墓表(수묘표) 成璣運 撰(성기운 찬) 于竪神道碑(간수신도비) 金容駿 撰.(김용준 찬)
임정 (林整) 1356년 (高麗恭愍王(고려공민왕)5년)~1413년 (太宗 1년)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 . 본관은 평택(平澤) 字(자)는 雲峰(운봉) 號(호)는輔德(보덕) 台順(태순)의 아들이다.향리로 입신하였고 녹사 도염서령(都染暑令) 낭장 都官佐郞(도관랑)을 거쳐 1385년(우왕11년)에 사헌부지평이되였다. 그뒤 판도정랑.
이조정랑. 의주목사를거쳐 1393년(태조2년)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北面 都巡 問察理使.(서북면 도순 문찰리사) 慶尙道 都觀察 黜陟使
(경상도 도관찰 출보사)등 외직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1년) 총제로서 충청. 경상. 전라도의 漕運體察使(조운체사)가되어 콩과 쌀을 전후 10만2000여석을 운송한 공으로 왕으로터 말한필을 하사 받았다. 같은해 경상,전라,충청도 제찰사겸 수군도절제사 조운염철사가 되어 3도의 주민을 동원하여 조성을거조하였데. 경상도에서 111척 전라도에서 80척 충청도에서 60척을 각각 받었다.
1403년 동북면도순문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엇고 이듬해 중군도 제로 명나라에가서 백성을 본국에 환속시켜준데 대하여 사례를하였다
1407년 형조판서를 거쳐 도북면 도순문찰이사 겸 영흥부윤이 되었가 1410년
다시 형조판서가되어 명나라에 하정사로 다녀왔다. 이듬해 서북면 순문사가
되었으나. 평양부에서 종기가나 4일만에 죽었다.
사람됨이 건실하고 중후하였으며 가느곳마다 치적이 뛰어나 백성들이 기꺼이 복종하였다는 사광의 평을 받았다. 성종조에 청백리에 뽑혔며 1482년(성종13년)에 사패로 산 40리를받았다 시호는 공혜이다.
《참고문헌》 정종실록, 태종실록, 공혜공역사록. 평택임씨대동보.
선왕조군선연구(김재근.일조각 1977년)
恭惠公 林 整 行蹟 (공혜공 임 정 행적)
林公整님은 安陰縣(안음현 거창과 함양사이)에서 1356年에 출생하였고 字는 운봉(雲峰)이고 호는 輔德(보덕)이다. 고려때 지방 향리로 입신하여 祿仕, 都染書令,(록사 도염서령) 郞將,(랑장) 都官佐郞(도관좌랑)을 거쳐 高麗 禑王(고려 우왕)11년(1385)에 司憲府 持平(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판도정랑과 吏曹(이조)정랑을 거쳐 義州牧使(의주목사)에 이르렀고 太祖 2年(1393)에 工曹判書,(공조판서) 5年(1396)에 中樞院副使 (중추원 부사)兼(겸) 이성도절제가 되었고 그후 서북면 都巡(도순)문찰리사와 三道(삼도) 都體察使(도체찰사) 및 刑曹 禮曹判書(형조 예조판서)를 두루 걸쳐 벼슬을 하였고 슬하에
仁山, 命山, 甲山을 두셨는데 이분의 後孫들도 많은 분들이 입신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우리 林門을 빛내어 왔고 特히 이분의 8代孫인 忠愍公 林慶業 將軍(충민공 임경업 장군)은 三國의 名將(명장)으로서 그 名聲(명성)이 지금 까지도 빛나고 있다.
高麗史,(고려사) 太祖實錄,(태조실록) 太宗實錄,태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傳(전)해지는 恭惠公 行蹟(공혜공 행적)을 살펴보면
1401년 8월 14일: 摠制 林 整(총제 임 정)으로 충청․전라․경상도의 漕運體察使(조운체찰사)를 삼았 다.
1401년 12월 9일: 漕運體察使 林 整(조운체찰사 임 정)을 司評右使(사평우사)로 삼았다.
1401년 12월 18일: 司評右使 林 整(사평우사 임 정)을 三道 體察使(삼도체찰사) 삼아 충청․전라․경상도 의 백성을 징발하여 漕船(조선) 5백척을 지으려니 겨울 추위로 인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롭게 여기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은 林 整에게 명하기를 漕運(조운)하는 일은 ?조운하는 일을 시기에 미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다. 이에 林 整은 ?외방 사람들이 사명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전일에 배를 만들다가 끝내지 못하였사오니 원컨대 왕지와 斧鉞(부월)을 주소서.?하니 왕이 이를 주었다.
1402년 7월 22일: 三道體察使 林 整(삼도체찰사 임 정)에게 西北面 道巡察里使(서북면 도순찰리사)로 삼았다.
1403년 6월 4일: 司憲府(사헌부)에서 前 三道體察使 林 整(전 삼도체찰사 임 정)과 慶尙道 水軍節制使(경상도 수군절제사) 盧仲濟(노중제)의 罪(죄)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용서하고 林 整등을 불러 말하기를?내가 경들에게 죄를 주려 한 것이 아니라 유사가 죄를 청하였기 때문에 의정부로 하여금 조율하였기 때문에 의정부로 하여금 조율하게 하였으나 무죄로 되었으니 경들이 論劾(론해)을 당하면 船軍(선군)이 속속 도망하게 되고 綠氈(록전)과 各道의 곡물을 강변에 버려두었다고 하니 경은 빨리 이를 수습하라?하여 林 整은 조아려 사은하니 왕은 술을 내려주었다.
1403년 6월 29일: 林 整을 東北面 都巡問使(동북면 도순문사) 兼(겸)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로 삼았다.
1407년 10월 3일: 林 整을 刑曹判書(형조판서)로 삼았다.
1408년 7월 13일: 林 整을 東北面 都巡問察里使(동북면 도순문찰리사)로 삼고 兩界(양계)의 首領(수령)들을 모두 武才(무재)가 있는 사람으로 除授
(제수)하였다.
1410년 2월 22일: 都巡問察里使 林 整(도순문찰리사 임 정)에게 明 조 연이 보고하기를?초목이 무성하여지면 賊(적)을 잡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빨리 군사를 행하시오. 만일 朝鮮에서 鐵騎(철기) 4백기를 내고 우리들이 2백기를 가지고 모인다면 싸움에 이길 수 있을 것이오.?하였다.
1410년 7월 6일: 왕은 林 整을 刑曹判書(형조판서)로 삼았다.
1411년 4월 2일: 賀正使 禮曹判書 林 整,(하정사 예조판서 임 정) 副使 漢城判尹 鄭 易,(부사 한성판윤 정 역) 謝恩使 寧暇君 權 弘,(사은사 영가군 권 홍) 副詞摠裁 金 彌,(부사총재 김 미) 種馬進獻使 吏曹叅議 禹洪康(종마진헌사 예조참의 우홍강)과 광록소경 鄭允厚(정윤후) 등이 京師(경사)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금 1정과 백은 10정, 단자 50필과 禮部(예부)의 咨文(자문)을 싸가지고 왔다.
1411년 11월 20일: 刑曹判書 林 整(형조판서 임 정)을 西北面 都巡問使(서북면 도순문사)로 삼았다.
1411년 11월 27일; 西北面 都巡問使 林 整(서북면 도순문사 임 정)이 예궐하여 辭朝(사조)하니 왕은 민대하여 명하였다.?그 道民이 주린다는 말을 많이 들으니 내가 심히 불쌍히 여겨 卿(경)을 명하여 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백성을 구제하고자 함이다. 곡식을 옮기어 진제하는 것은 이미 명령을 내리었다. 그리고 表裏(표리)(옷의 겉감과 안집)와 말 1필을 하사하노라.?
1412년 1월 21일: 왕은 입궐한 西北面 都巡問使 林 整(서북면 도순문사 임 정)에게 藥酒(약주)를 마시라고 명하며 말하기를?경이 본래 병이 있는데 외방에서 지금 비록 술을 금하기는 하나 마땅히 약으로 마시라.?
1413년 4월 28일: 西北面 都巡問使 林 整(서북면 도순문사 임 정)이 卒(졸)하였다. 왕은 林 整(임 정)이 평양부에서 卒(졸)하였다는 부음을 듣고 슬퍼하여 代言(대언)에게 명하기를?諡號(시호)를 내려 주고 賻儀(부의)를 보내는 것은 常典(상전)이다.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祭祀(제사)를 지내도록하라. 또 林 整이 죽을 때 반드시 병을 여러 날 앓았을 터인데 官屬(관속)은 어찌하여 일찍 아뢰어 치료하게 하지 않았느냐? 그 연유를 물음이 옳다.?이에 判事在監使(판서재감사) 이계공을 보내어 교서를 내려 祭祀(제사)하게 하였는데 이계공이 복명하기를 ?발쫑한지 4일만에 죽어서 치문하지 못했었습니다.?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林 整은 사람됨이 근실하고 중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뛰어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기꺼이 복종하는 명관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술회하였다. 그후 諡號(시호)를 恭惠(공혜)로 받았으며 성종때에 이르러 淸白吏(청백리)로 뽑혔고 성종 13년(1482)에 賜牌地(사패지)로 山 40里를 下賜(하사)하였다.
보덕재 공혜공 제실
공혜공 2009년11월월17일
시제에 참석해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의말씀 드립니다.
내년에도 많이 참석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특히 행사를 주관해 주신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시제사 행사 2009년11월17일 모습
공혜공 신도비(마을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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