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임(林) 문중임(林)
유래
범임씨(汎林氏)의 도시조는 학사공(學士公) 임팔급(林八及)이다.
그는 중국 당(唐)나라 말엽(서기840~900) 문종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동료 일곱학사와 함께 산라로 건너와 국가의 난을 평정하고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지금의平澤龍浦里)으로 옮겨와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평택(본래 팽성임씨)라 하였으나. 상계에 대하여 확실한 고증이 없어 세계(世系)를 갖추지 못하여 후손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평택임씨는 고려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중시조로 하여 임 정(林 整)과 임경업(林慶業)으로 이어오는 계통과. 고려말 삼중대광 평성부원군 임언수(林彦脩)를 1세로 하여 아들 임성미(林成味). 임견미(林堅味. 임제미(林齊味). 임세미(林世味).로 이어지는 충정공계(忠貞公系)가 있다.
평택임씨는 후대에 와서 선산(善山).진천(鎭川).예천(醴泉).부안(扶安).울진(蔚珍).은진(恩津).순창(淳昌).경주(慶州).옥야(沃野).옥구(沃溝).익산(益山)등 25개 관향으로 분관되었다. 그러나 관향만 다를 뿐 도시조 임팔급(林八及)을 유일조로 하는 같은 혈손이라는 것이 평택임씨를 중심으로 한 대다수 문중의 공통된 견해이다.
다만 고려 대장군(大將軍 종3품 임 비(林 庇)를 원조로 하는 나주임씨(羅州林氏)는 임 비(林庇)의 선대(先代)에 관해 입증할 기록이 없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나주임씨, 회진임씨)를 제외한 임씨(林氏)들이 후 갑자보(甲子譜)를 수보(修譜)하면서 도시조 학사공(學士公) 임팔급(林八及)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자리 잡은 팽성(彭城)으로 관향을 통일하자는 운동을 벌였었으나 아직까지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평택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 : 문관을 뽑아 쓰기 위한 과거로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나눠있음)에
20명. 사마시(司馬試 : 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52명 등 91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여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평택임씨는 1985년에는 46.670가구에 인구194.551명이 었으며. 2000년에는 65.015가구에 210.089명이 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한 내용을 평택임씨 익산공파 퇴촌대종회장(회장 임명본)의 요청에 의하여 2015년5월13일 수정하게 되었음>
※ 족보 자료마당
'목사공 김포종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興七賢東渡時 各昑絶韻(흥칠현동도시 각금절운) (0) | 2015.09.04 |
---|---|
통훈대부 휘 得長(득장) 묘갈명 (0) | 2015.08.12 |
메르스 (중동 호흡기 증후군) 예방 수칙 급히 전합니다. (0) | 2015.06.05 |
사람답게 사는 길 (0) | 2015.05.16 |
정월대보름 (0) | 2015.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