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객령공계 대종회/자유게시판

여주영릉에 효종대왕릉

임홍규 2015. 6. 2. 02:17

 

 

 

 

     효종 대왕 (1619 - 1659)

 

반청사상을 가진 세자 : 소현세자와는 반대로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랐다. 봉림대군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반청사상만이 가득차 있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봉림대군을 다시 왕세자로 맞이했다. 전쟁에 봉림대군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어떻게 망하게 만드는지 청나라의 잔인함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조는 자신과 같은 사상을 가진 봉림대군을 반갑게 세자로 맞아들였다.

 

효종의 즉위 :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뜨자 봉림대군이 즉위하였으니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식을 치르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청나라 심양에 있을때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 즉시 인사를 단행하였다. 우선 파당을 지어 싸우는 두사람, 영의정 김자점과 호조판서 원두표를 파직시켜 귀양을 보내고, 유학의 거목이요 대학자인 송시열을 등용시키는 등 절개가 굳고 새로운 인물을 천거하였다. 효종은 반청사상이 강했으므로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청나라가 군사를 일으켰으나 외교로 무마하였다. 이로인하여 효종은 북벌을 결심하였다.

 

효종의 업적 : 효종은 역법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의 역법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지는 점을 알고 태음력을 구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각을 계산하여 제작을 하였다. 또 백성들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하여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북벌론 : 1652년 효종은 북벌을 실시하기 위하여 이완을 어영청 대장으로 임명하고 군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호위를 맡을 군사를 모두 기병으로 바꾸었다. 또 서울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성곽을 손질하고, 잘 훈련된 병사를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북벌 계획은 10년 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지방의 군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각 도의 절도사는 이 병사들을 두 달씩 한양으로 보내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1653년 제주도에 하멜이 표류하자 그를 훈련도감에 감금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발하도록 하였다. 온 나라와 국민들이 화합하여 청나라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벌론에 차질이 생겼다. 이는 백성들의 살림이 워낙 가난하데다 흉년까지 곁들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웠고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싸움까지 드세어졌기 때문이다.

 

효종의 가족들 : 효종의 부인은 2명 이었는데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16녀를 두었다. 1659년 전국에 가뭄이 휩쓸고 있을 무렵 원대한 북벌 론의 계획을 남겨둔 채 효종은 세상을 떠난다.

 

 

 

                                                                                   여주 효종대왕릉 입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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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입구 제단

 

                                                                                 효종대왕 묘소

 

                                                                      효종대왕 묘소 하 인선왕후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