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임林씨
임林씨
전국의 임씨는 본관수가 30여개에 달해 국내 성씨 중 10위권 안에 드는 대성이지만 모두 한뿌리라고 믿고 있으며. 태원인太原人 임온林蘊을 원조原祖(득성조得性祖)로, 당나라의 정치적인 화를 피해 동도하여 신라에 망명, 귀화해 이 땅에 임시의 뿌리를 내린 8학사 중의 한사람인 임팔급林八及을 원조原祖(동도조東渡祖)로 받들고 있다.
오늘날 임씨의 언원을 소급해 보면 당에서 신라로 이주해 온 임팔급을 시조로 하는 평택임씨와 고려 충렬왕조에 대장군으로 활약한 임비를 시조로 하는 나주임씨로 나누어 볼 수 있다.이중 평택임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70%이다.
본관별 임씨(2000년 기준)
평택임씨 은진임씨
1.본관 현 지명: 경기도 평택시 1.본관 현 지명:충남 논산시 은진군
2.시조:임언수(충정공계),임세춘(전객령계) 2.시조:임성권
3.인구수:210,089명 3.인구수:9,408명
4.주요인물:임경업(장수) 4.주요인물:임 훈(광주목사)
임씨 유래의 두 가지 설
첫째는 중국 요임금 때 신인 한분이 기주冀州 태원현太原縣의 두 나무(木+木)아래 내려왔는데 그 용모가 심히 거룩하고 또한 재주와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 임林 이라는 성을 내렸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 은殷나라 말엽의 왕자인 비간比干의 아들 견堅이 망국의 한을 품고 장림산長林山에 은거했는데 여기서 장림산의 '임'자를 써서 성을 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BCE 1000년경 비간이 당대의 폭군 주왕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니 주왕이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염통에 구멍이 아홉 개가 있을 것이다”하면서 비간을 죽였다.
비간고잉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 진씨는 임신중에 장림산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으니 천泉이라 하였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건국되자 무왕이 천을 찾아 임林씨의 성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평택임씨平澤林氏
1도시조都始祖 임씨의 도시조는 학사공 임팔급林八及이다, 그는 당나라 말엽(서기830~900년대)에 정치적인 화를 동방으로 피신한 8학자 중의 한사람으로 전해진다. '평택인씨 세보서世譜序부록'에는 ...“시조 한림학사공은 당나라 문종 때 너무 충직하시므로 군소 간신배들의 참소를 받으셨다. 드디어 동료 일곱 분과 동해를 건너 신라로 오셨다. 먼저 국가위난을 평정하고 팽성彭城 용쥬방龍株坊(현 평택 용포리龍浦理)에 오셔서 살으셨다. ”로 기록되어 있다.
관향 평택은 시보 임팔급이 자리를 잡았던 고을 이름이었다.
대다수 임씨들은 관향만 다를 뿐 임팔급을 통일 시조로 모신다. 다만 나주임씨는 임팔급과의 연계성을 입증할 기록이 없어 예외다.
평택임씨는 전객령계와 충정공계로 나뉜다.
2 전객령계典客令系 고려말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을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중시조로 한다. '갑자보甲子譜' 에 따르면 임팔급을 시조, 임몽주를 중조, 임세춘을 기세조로 본다. 병자호람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이 이에 속한다.
3 충정공계忠貞公系 충정공계의 1세조는 임언수林彦脩이다. 고려말 문과에 올라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태위太尉 찬성사贊成事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충정忠貞으로 시호諡號되었다.
나주임씨
1시조始祖 나주임씨의 시조는 임비林庇이다. 고려 충렬왕 때 벼슬길에 올라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까지 시종한 공으로 보좌공신 2등이 되었다. 뒤에 대장군이 되었고 충청도 도지휘사에 이어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비 이전의 상계는 오래된 일이어서 상세히 알 수는 없다. 대동보 범례에 의하면 임비 이비이전에도 몇 대에 걸쳐 고관을 지낸 인물이 있으나 증 거할 문적이 없으므로 임비를 시조로 하되. 처음에 쓰는 조부에게 '始'자를 쓰는 것이 미안하여 원조遠祖라고 쓴다고 되어 있다.
2 회진임씨會津林氏가 나주임씨로 바뀐 연유 나주임씨 본관의 유래는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가운데 한 분이심 9세손 감무공 임탁林卓이다. 그는 고려말에 해남감무를 지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굳게 지키고자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회진會津에 은둔하여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어 본관을 회진으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는 회진임씨라 하였는데, 그 뒤 횐진현이 나주에 속하게 됨으로써 관명을 나주로 고쳤다.
선산임씨善山林氏(경북 구미시 선산읍)
시조는 신라말 중랑장을 역임한 임양저林良貯이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여 고려에의 귀순이 부당함을 극간하였다가 경순왕의 노여움을 사서 산산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뿌리를 내려서 득관하였다고 전한다. 임씨 중에서 제일 오래된 득관으로 ; 임씨요람林氏要覽' 에 선임관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안임씨扶安林氏
시조는 임계미林季美로서 임팔급의 7세손이다. 고려때 왕으로부터 조그만 혐의를 받아 목숨이 위협받는 계략에 빠지고 알았다. 뱃놀이를 핑계삼아 배에 탔던 임계미 등 세 사람은 돌이키려는 왕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풍랑에 휘말려 고초를 겪으면 서 지금의 부안면 포구에 닿아 상륙하게 되었다.
그 후 왕의 오해가 풀려 보안백保安伯을 봉하고 그곳에 정착케 하니 이로써 관향을 삼게 되었다. 부안임씨는 고려의 대표적인 거족이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문과급제자를 6명밖에 배출하지 않을 만큼 관로와 담을 쌓고 지냈다.
조선개국의 역성혁명을 당하여 임난수를 중심으로 그 앞뒤의 자손들이 한결 같이 고려조에 대한 절의에 충실함으로써 관직으로의 현달은 보지 못했다. 역사의 전환기에 이처럼 절의에 충실했던 가문도 드물 것이다..
순창임씨淳昌林氏
시조는 임중연林仲沇이다.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충숙왕을 잘 보필한 공로로 우상시右常侍. 밀직부사. 첨의찬성사가 되어 순창군에 봉해졌으며 왕을 대신하여 정동성征東省을 다스렸다.
그래서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분관하여 순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임중연의 아들 임선미林善味는 고려말 태학사太學士를 지내며 퇴폐한 예법과 세속을 바로 잡는 데 힘쓰다가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호가 두문제杜門濟로 두문동 72현의 얼굴과 같은 존재다.
고려거족으로 임씨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모든 벼슬길을 사양하였다. 고려의 녹을 받은 고려의 대표적인 가문으로서 조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임시는 명실상부한 고려의 대표가문이었다.
〈참고문헌〉
김동익,『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1989
김진우,『한국인의 역사』춘추필법,2009
[출처] 한국의 성씨 임林씨|작성자 상생열매
나주임씨의 시조는 임비(林庇)이다. 임비는 고려시대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했던 공으로 보좌이등공신에 책록되었고, 뒤에 상장군과 충청도도지휘사,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 오른 인물이다. 나주임씨 세보에서는 그 이전에도 여러 대에 걸쳐 고위직에 오른 인물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임비를 원조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나주임씨가 임팔급을 도시조로 하는 평택임씨에서 분화되었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하지만, 평택임씨 보다 인구가 많은 나주임씨 측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나주임씨가 나주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임비의 9세손인 임탁(林卓) 이후로 추정된다. 임탁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금성(錦城·나주) 회진(會津)으로 낙향했다. 그로 인해 본관을 회진으로 정하고 세계를 이어왔다. 뒤에 회진이 나주에 속하게 되자 나주로 고치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일부 나주임씨 중에서는 아직도 회진임씨로 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주임씨는 조선 초기에 분파되기 시작했는데, 임탁의 손자인 임유소(林有巢)를 파조로 도정공파(都正公派)가 분리되었고, 임유소의 손자 대에서 큰손자인 임귀연(林貴椽)의 후손이 장수공파(長水公派), 정자공파(正字公派), 절도공파, 첨지공파, 생원공파, 첨추공파(僉樞公派)로 파생되었다. 또 둘째손자인 임귀량(林貴樑)의 후손에서 진사공파가 분파되었다.나주임씨에서 배출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218명으로, 문과 49명, 무과 16명, 사마시 132명, 역과 8명, 의과 4명, 음양과 8명, 주학 1명 등이다. 그 중 상신에 오른 사람은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임한호(林漢浩)가 있다. 현재 나주임씨는 전라남도 나주·완도·장성 등 호남지방에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달성과 충남 서천군 일대에도 거주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나주임씨는 총 7만3556가구에 23만68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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