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객령공계 대종회/대 종 회

여말선초의 명신 청백리 임정선생(林整 : 1356~1413)

임홍규 2010. 10. 23. 10:02

 

 

                                                        용인신문 가사의 사진과 동일하지않아 양해를 구합니다.

 

 

                여말선초의 명신 청백리 임정선생(林整 : 1354~1413)

 

청렴결백의 준말 “청백리”

청백리(淸白吏)란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다. 이는 청렴결백의 준말로서 관직의 수행 능력과 더불어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관료에게 주어지던 칭호이다.

조선시대에 청백리가 배출된다는 것은 정승판서가 나오는 것보다 더 큰 영예이며 대대손손 가문의 큰 자랑으로 여겼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아 어느 문중에서나 청백리에 오른 조상을 다른 어느 것보다 자랑과 긍지로 여기고 있다. 용인에는 최유경선생과 아들인 최사의가 부자(父子)청백리로 유명하고 모현면에도 청백리 김약향 선생의 묘가 있다. 그리고 이동면 묘봉리에 또 한분의 청백리가 있으니 바로 임정(林整 : 1356~1413)선생이다.

 

백성들을 먼저 생각한 청백리 ‘임정’

선생은 본관이 평택(平澤)으로 자는 운봉(雲峰)이며 호는 보덕(輔德)이다. 사복시윤(司僕寺尹) 태순(台順)의 아들이다. 선생이 태어난 때는 고려말이나 주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 태종임금 시대이다. 향리로 입신하여 녹사와 도염서령(都染署令)을 거쳐 1385년(우왕 11)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398년(태조 7)에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벼가 익지 않게 되자 백성들은 상수리와 밤을 주우러 다녔다. 당시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있던 선생은 가을갈이를 한 후까지 잠정적으로 노비의 송사 판결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조치였던 것이다.

1401년(태종 1)에는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조운체찰사(漕運體察使)가 되어 조운선 500척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어 삼도(三道)의 도체찰사겸수군도절제사(都體察使兼水 軍都節制使)와 조운염철사(漕運鹽鐵使)를 역임하였다.

 

 

1402년에도 조운선을 만들어 삼도의 쌀과 콩을 배로 운반하였는데, 그 양이 모두 10만2천여 석이었다. 선생은 이공으로 왕으로부터 말 한필을 하사받았고 이후 참지승추부사(參知承樞府事)를 겸하게 되었다.

 

1403년(태종 3)에는 선생이 조운선을 감독하지 않고 육로로 오는 바람에 30척이 바다 가운데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러자 사헌부가 선생을 탄핵하였으나 의정부에서 무죄 방면하였다. 곧이어 동북면 도순문사겸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05년(태종 5)에는 환속시켜준데 대하여 사례를 하였다. 1407년에는 전라도 도절제사가 되었다가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동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겸 영흥(永興)부윤에 제수되었다. 1410년(태종 10)에는 형조판서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치적이 뛰어나 태종임금의 신임을 받아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을 자주 내렸다. 금주령이 내리면 술을 빚어 마실 수 없었다. 임금이 솔선했음은 물론이다. 술은 주로 쌀로 빚었기에 식량사정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조처였던 것이다. 1412년에는 술을 금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서북면도순물찰리사로 있던 선생에게 약주(藥酒)를 마시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태종임금의 신임정도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선생은 성품이 근실하고 중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뛰어나 백성들이 온순 동화하였다는 사관의 평을 받았다. 성종 때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1482년(성종 13년) 사패(賜牌)로 산40리를 받았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며 선생의 묘소는 처인구 이동면 묘봉상리에 있다. 본래 신도비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멸실되었고 마을 입구에 있는 것은 최근에 새로 세운 것이다.

 

용인신문 제 110호 2009년7월27일자 기사

향토문화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