崇慕祠重創事蹟碑
(숭모사중창사적비)
평택임씨(平澤林氏)가 이 땅에 정착(定着)하여 국내(國內)에서 굴지(屈指)하는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 될 수 있도록 그 통제(統緖)를 드리우고 아울러 그
기초(基礎)를 닦은 분은 시조 충절공(忠節公) 팽성군(彭城君) 휘팔급(八及)이다.
이 以前에 天下의 모든 林氏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받는 분은 중국 고대 주무왕(周武王)으로 부터 姓名을 하사(下賜)받았으니 姓은 林이요, 휘는 견(堅)이다.
채읍(采邑)이 박능(博陵)이기 때문에 박능공(博陵公)이라고도 부르니, 곧 공자(孔子)가 은말(殷末)의 三仁이라고 일컬었던 사람 가운데 한분인 비간(比干)의 아들이다. 팽성군(彭城君) 팔급(八及)은 당(唐)나라 말엽에 팔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팽성에 도착했으니 팽성은 지금 평택 팽성읍의 안정리다.
이후로 숭덕(崇德)과 석학(碩學)과 거공(鉅公)과 명경(名卿)등이 대대로 끊임없이 배출(輩出)되니 자연히 국내에서 인정받는 명문(名門)과 망족(望族)이 된 것이다. 이처럼 명문과 망족이 되는데에 크게 기흥(寄與)하여 중시조(中始祖)와 현조(顯祖)로 불리워지는 분들의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고, 그 공덕(功德)을 기리고 추모(追慕)하여 제향(祭享)하는 곳이 충주의 단월동에 있으니 이곳이 곧 숭모사(崇慕祠)다. 서기 일천구백칠십년에 건립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삼십년전 일이다. 이곳은 또한 뛰어난 무공으로 당세를 진동(振動)시키고 후세에 영명(英名)을 떨친 후손 충민공(忠慜公) 곡송(孤松)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사당인 충열사(忠烈祠)의 뒤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이곳 숭모사에 제향된 분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하기와 같다. 중시조(中始祖)인 휘 세춘(世春)은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합격한 세자전객령이니, 부인은 정부인 청주경씨(淸州慶氏)다. 전객령의 큰 아들 휘 재(榟)는 문과에 합격한 예의판서 보문각 대제학이니, 부인은 정경부인제주고씨(濟州高氏)다. 전객령의 둘째 아들 휘 보(椺)는 공조판서니, 부인은 정경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다. 대제학의 큰 아들 휘 태순(台順)은 사복시윤이니, 부인은 숙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다. 대제학의 작은 아들 휘 台吉은 전적이니, 부인은 숙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다. 공조판서의 아들 휘 무(茂)는 통례원 봉례니, 부인은 숙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다. 오호라 처음 이곳에 봉사(奉祀)한 일대조인 전객령공과 종파의 이대 및 삼대조 등 삼위분과,후에 추배(追配)한 지파의 삼위분 모두 그 산소를 실전함은 물론 다른 사적도 전해지는 것이 거의없다. 그래서 후손들이 추모(追慕)의 마음을 붙일 곳이 없으니, 부득이하여 그 대안으로 숭모사를 세워, 위로는 외로운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애달픈 마음을 달래려는 것이 사당을 창건한 의미다. 추배(追配)는 서기 일천구백팔십이년 종파의 화수회가 전객령파의 대종회로 확대 개편됨과 동시에 지파인 공조판서,전적,봉례 등 삼위분도 합사(合祀)하기로 결의했고, 그 뒤 이천삼년부터 육위분을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제향하기 시작했다. 오호라, 숭모사는 처음 세웠을 때도 그 장소가 협소하고, 그 규모 역시 크지 않아 국내 거족의 중시조와 현조들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서는 걸맞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삼위분을 추배하게되자, 장소와 규모가 더욱 비좁아지고 작게되니 향사에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금년에 이 건물을 해체한 뒤 다시 복원하면서 크게 확장하니 수많은 후손들의 추원(追遠)과 본보(本報)의 정성을 표현함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후손들은 물론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이 사실을 주지시켜 조상을 경모하는 마음을 고취하고 동족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후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대의 세덕(世德), 숭모사 건립의 동기(動機) 및 목적, 여기에 제향된 분들의 행적(行蹟)을 기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를 간절히 염원하는 여러 임씨 후손들의 청탁(請託)을 사양하지 못하여 이처럼 기록하고 아울러 명(銘)을 붙인다.
명(銘)에 이르기를
인인(仁人)의 후예(後裔)로 감화(感化)하네 기풍(其風)에, 계탁(桂棹)으로 부해(浮海)하여 표연(飄然)히 치동(到東)했네. 무징(無徵)한 기송(杞宋)에 내하(奈何)오 기통(其恫)을, 사척(四尺)의 전실(傳失)이여 타령(妥靈)은 반궁(反穹)하네 결정(潔精)히 봉(奉)작에 성극(誠極)하고 물풍(物豐)하네, 기사(其祠)를 중창(重創)하니 영전(永全)하여 무궁(無窮)하리
단기 사천삼백사십(서기 이천칠)년 음 율월 중순 진주 소강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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