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팽성백 林公 제단비(祭壇碑)역문(譯文)
옛날 우리 단군께서 아홉 종족을 사랑하고 기자성인이 동방으로 오시니 두성인의
교화가 퍼젔다. 이로써 공자말씀에 살고 싶은 탄식이 나올 때는 배를 타는 것이었다.
학사공 八及은 당(唐)나라 말엽 공장(孔張)의 화(禍)가 묘(墓)를 측량(測量)한데서
기회(機會)되었다고 참소하니 드디어 七人의 현사(賢士)가 빠르게도 낙랑 사람들의 배를 타고 긴 말로 노래하며 왈『사람이 바다에 뜨니 의지할 곳은 계수나무 돛대와 난장대로다』하면서 차차 六四자의 말을 했다. 그 쉬울 일이냐 아니다. 군자(君子)는 시화덕을 보고는 난을 피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지나고 백재를 넘어서 신라의 팽성 용주방을 점거하였다. 그것은 중국
고대현인 백리해의 지해를 배움이라. 벼슬이 팽성백에 이르니 자성(子姓)을 신라.
고려. 조선조의 천유여년을 이르도록 면면히 내려왔다.
갑자년에 공의 후손이 한성에 대동종약소를 설치하고 족보가 이미 되어 만수지감이라 한 권 책을 열면 요연하다. 드디어 화수회를 열고 웃고 즐거워하는 일가가 되었다. 혹이 한 말을 한다면 학사공의 의복과 신발. 갈문 묘소는 이미 실전되고 향사의 향화도 궐사가 되었으니 이 행동을 어찌할까.
사당을 짓고 묘소에 모든 예를 갖춘다면 그것을 혹 느림부릴수 있지만 이미 있는 묘에 다시 사초한다면 비록 글을 모르는 고인이 많다 하여도 많이 행하는 자는 드디어 땅을 가려서 千명의 큰 장사가 도우려고 운집하여 단을 모으고 각을 세워서 三月三日에 제사하고 그 이튼날 웃고 즐거워하며 정착하는 식이 되었다. 해와 더불어 봉선 돈족하는 도를 하지만 이에 다할까. 학사공의 끼친 음덕 그 백세가 되어도 쇠하지 아니 할 것이다.
가선대부행 승정원 도승지 겸 규장각 직제학 여흥 민병승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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