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愍公 林慶業 將軍의 業績과 遺蹟
公은 忠淸道 忠州에서 生長하시였다.
本貫은 平澤이며 字는 英白,號는 孤松 諡號는 忠愍이며 世子 典客令公의 12世孫으로 8兄弟중
넷째이며 5兄弟가 武科에 及第를 하다. 1615년 全州 李氏 진안대군 7世 孫女와 結婚
及 弟 : 1618년(광해군)무과에 급제
1622년 : 평안도 소농보권관직(傳,수중에서 큰 뱀이 신비로운 단검을 주다)
1624년 :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일등진무원종공신 가선대부
1625년 : 행 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방답진첨절제사
1626년 ; 전라도 낙안군수 재직,낙안읍성을 석성으로 수축,전라좌영장(1627)
으로 정묘호란시 강화도로 출정,왕이장군복을 하사.
1629년 : 용양위 부호군으로 제찰부별장을 겸하다. 운암.능한산성을 수축.
1630년 :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 용골성을 석성으로 수축.왕은 공에게 말을
하사하고 청병600기를 구유시키다.정주목사로 임명하다.
1633년 : 청북방어사겸 영변부사시 백마산성과 의주산성을 석성으로 수축.
명나라에 반란군을 토벌하여 명나라 총병 벼슬과 금화를 받다.
1634년 : 의주 부윤겸 청북방어사.만주에 물화를 무역하여 백성을 구조하니
원근에 백성들이 모여 들었다.
1636년 :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편에 송골산과 봉화산에 봉화대
를 설치하고 백마산성과 의주산성에서 청군과 대치하니 청군의
남침이 지체되어 남한산성으로 행차하는 인조대왕이 무사했다.
청태종이 항복을 받고 회군할 당시 청태종의 조카인 요괴를
압록강에서 무찌르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우리 군대를 찾다.
1637년 : 청국의 수구장으로 파견되어 포로가 된 왕세자를 도우니 왕세자는
공에게 의복을 하사하다.
1638년 : 자헌대부 대호군에 임용됨.왕은 공에게 말 한필을 하사하고
의주부윤으로 복직시키다.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가 되다.
1639년 : 조정에서는 공을 청나라 주사상장,황해병사 이완을 부장에 임명.
1640년 : 청국의 요청으로 수군 상장이 되어 포수 4000명,수약 10000근,
철환 42000개,조총 4170정,군량미 17160석,세곡미 10000석으로 출전
1641년 : 연초를 팔아 누만금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돕고 군량에 쓰다.
1642년 : 청국으로 압송도중 탈출하여 승려로 변신하다.
1643년 : 서혜를 거쳐 명으로 망명 명에서 총병으로 후대하여 추대하다.
청국에서 공의 부인 이시를 압송하니 부인 이씨는 자결하다.
1644년 : 공은 명나라에서 공을 많이 세웠으나 1645년 청국에 감금되다.
1646년 :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으로 간신배들에 의해 서거하다.
1697년 :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고 충민의 시호와 충렬사를 건립코 제향.
1726년 : 충주 달천에 충렬사와 별묘를 비롯하여 이후 낙안읍성에 충민사
및 선정비각,연평도에 충민사,평안도 선천의 충민사,백마산성의
현충사,겸천의 충렬사를 건립하고 배향하였다.
1788년 : 정조대왕이 공의 유상을 묘사하여 영정을 모시게 하다.
1791년 : 정조대왕이 어제 비를 세워 공을 찬양하였다.
1975년 : 충렬사를 신건물로 건축 단장하여 성역화 하고 묘역을 정화하다.
2002년 : 충주시에서 공의 동상을 제작하여 호암동 시민공원에 모시다.
林慶業 將軍의 出生地와 傳說
임 경 업 장 군 의 출 생 지 와 전 설
임경업 장군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은 서울 송파구 문정동 20-7번지 (前 광주군중대면 괴룡리)로 이곳에는 6~7백년된 큰 느티나무 두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송파구에서는 이곳이 임장군의 출생지라고 송파지에 실린바 있다. 또한 송파구 전 문화원장 엄창섭씨는 이곳에서 10여대를 살아온 토박이로서 옛날부터 임장군의 출생지라고 전하여 왔다고 하였으며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 이곳 문정동과 거여동 그리고 마천동과 오금동 일대에 임장군의 전설이 풍성하게 전하여 내려오고 있는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이곳 일대가 중대면 괴룡리였고 임장군의 조부 산소가 있던 곳이다. 많은 전설중에 몇까지만 소개하면 임장군 출생전에 장군의 조부가 작고 하였는데 승려3인이 찾아와 닭의 알을 밤에 산에다 묻고 새벽에 장닭이 되어 우는곳이 명당자리라고 알려주어 그곳에 산소를 모셨다한다.
옛날부터 임장군 바위로 불리우는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도로확장으로 장군바위는 묻히고 없다. 마천동 마산이 있는데 임장군은 이마산에서 용마를 얻어타고 진터벌과 메나벌(거여동소재)을 달렸으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즐겨했다는 것이다. 병정놀이로 모래성을 쌓고 놀이를 하는 도중 고관의 행차가 이곳을 지나려고 하니 소년임장군은 고관의 행차를 가로막고 여기는 우리군의 진영이니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러 고관의 행차는 돌아갔다는 것이다. 하루는 병정놀이 소집에 과부의 아들이 참석치 않았다. 소년임장군은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가 아이를 군영으로 데려와서 군률에 의해 처형하니 장군의 아버지가 송사에 걸려 관가에 끌려 다니게 되었다. 장군은 관가에 쫓아가 소리치며 풀어줄 것을 강력하게 항거하니 관가에서는 풀어주었으나 장군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살수없다며 이분의 선친묘소를 남겨두고 원주군 부론면 손곡리로 이주를 하였다는 것이다.
손곡리에는 이분의 증조부와 고조부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후에 다시
충주로 이주하니 충주가 근거지로 알려진 것이라 사료된다. 전해 내려
오는 전설과 남아있는 느티나무와 장군바위 그리고 마산의 진터벌,메나벌과
문화원장의 증언등을 고려하면 이곳 문정동이 장군의 출생지인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충렬사 경내 사진 (충북 충주시 단월동 소재)
'전객령공계 대종회 > 대 종 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鼻祖 諱 八及公 東渡說 (0) | 2019.04.23 |
---|---|
上系史에 對한 考察 (0) | 2019.04.14 |
정기총회(2019년도) 및 숭모사 1. 2, 3세조 제향 아내문 (0) | 2019.03.27 |
충주 충렬사 임경업장군 추계 제향 (0) | 2017.11.07 |
2016년도 파주고려역사선양회 대제 안내 (0) | 2016.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