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지방의 한글 제문
안동지방의 한글 제문
(홍윤표 : 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어학회 회장, 국어학회 회장의 기고문 과 안동의 한글제문에서
발췌한 내용임.)
원래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하직했을 당시에는 경황이 없고 슬픔이 극에 달해 돌아가신 분에
대한 그리움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이 더 커지다가 차츰 세월이 흐르면
서서히 그리움을 잊어 가는 것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장사 지낼 때의 제문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소상과 대상 때의 제문이 많이 남아 있으며 또한 그 제문의 애절함도 더합니다.
1998년 안동민속박물관에서는 안동 지역의 각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한글 제문 94편을 모아
사진과 함께 <안동의 한글 제문학술 총서>란 책을 펴냈는데, 이들 제문은 거의 모두 20세기이후에 작성된 것들입니다. 이것을 분석해 보면 가장 많은 것이 아들이 어머니께 올리는 제문이고, 이어서 아들이 아버지께 올리는 한글 제문이 많아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자식들이 부모님의 상을 당했을 때 쓴 제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사위가 장모에게 올리는 제문이 그 뒤를 잇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제문은 어머니가 앞서 저 세상으로 간 딸에게 쓴 제문입니다. 16세에 시집을 보냈다가 19세에 저세상으로 간 딸의 죽음 앞에 어머니는 “장유유서 분명커든 선후도착 왠 일이냐”고 애절한 심정을 읊고 있습니다.
한글 제문이라 하여 우리가 추측했던 것 처럼 여성들만 썼던것은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이 한글로
제문을 썼는데 다만 특이하게도 전국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한문제문과는 달리 한글 제문은 주로
영남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그 중에서도 주로 경북 지역에서 발견되며, 그 중심 지역은 대체로 안동, 예천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경북의 남부 지역에서도 보입니다만 극히 적은 수입니다.
왜 이 지역에서 한글 제문이 유행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물아 보아도 그 이유를 아는 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지역이 이전부터 한글로 쓴 내방 가사가 많이 전래되고, 또 안동 지역이 내방 가사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동 지역의 사대부 집안은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의 장롱 속에는 아직도 한글로 쓴 가사 작품이나 한글 편지 또는 한글 제문이 한두 편씩 들어 있습니다. 주민 모두가 한글로 글을 쓰는 것이 생활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글 제문이 이 지역에서 쏟아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음식디미방>과 같은 문헌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글 제문이 유행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한문으로 된 제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도 등장하게 됩니다.
예컨대 ‘숙종 대왕 민비 제문’이라든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문’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래에 안동의 한글 제문 중에서 재미있는 몇 편을 가려서 읽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한글은
한자로 변환시키고 사투리는 표준말로 바꾸어 소개합니다.
1. 누나가 남동생을 위한 제문
維歲次 癸丑 正月 庚午朔 三十日 己亥 親家 潁陽千公 小祥之日夜也라 前日夕인 戊戌에 不遇한 이
누이는 菲薄之奠으로 靈筵아래 엎드려 소리치며 슬프게 울며 말하노라 오호 통재며 오호 애재라
仁厚한 우리 남동생 안부 묻자 訃告紙가 웬일인고 이런 변이 있단 말가. 가까이 사는 이 누이는 동생 문병 間間이(틈틈이 라는 뜻) 못 해 보고 遺言하는 말 못 들어 일천주 유한이면 육십칠세 正命턴가 그리 바쁘시며 슬프다 蒼天,아 이 광경이 웬 일인고 창천 창천이 문어지고 白日해(하얗게 빛나는
해를 말함)가 無光이라 이런 변이 있다 말가 五臟이 재가 되고 胸臟이 막막하네 애통할 사 우리 兄弟
대락 정곡 알이오며 나는 남편 문씨 가문으로 성혼되어 二男二女 四男妹 각각 成婚시켜 多男多女
生有할 제 親家 우리 남동생은 이씨 가문 성혼 데여 사남이녀 육남매를 애지중지 여기시다 육십 연하 못다 보고 玉京星京 되오시니 동생 사직 길오 못 면하야 삼일 후 旬葬이라 高臺廣室 던져두고 末年幽宅 돌아들 제 어찌 갈고 어찌 갈고 深深山谷드러가면 名山臺地 자리 잡아 平土墳行 지은 후에 수백 賓客 흩어진다. 우리 여러 조카 애통 소리 산천이 용열이고 초목이 含淚로다 靑山石壁을 일부로에 찾는 사람 어느 누며 細雨비 훗날릴 제 어느 친구 찾아오리. 靑山夜月 달 밝을 제 杜鵑聲만 처랑토다 오호 애재 우리 동생 九泉 行者 전송하고 양안에 피눈물을 앞치마에 담아 안고 親宅으로 돌아가니 이 누나는 無用이라 슬푸다 우리 동생 日月이 불거하야 이 날이 朞年 忌日 금일이라 일자는 돌아왔건마는 동생은 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고 지리산 回春커든 春色 따라 오실런가 오는 날이 어느 땐고 來年 回春 삼월 되면 꼿필 때에 春風 따라 오실란가 晉陽江 달 뜨거던 月色 따라 오실런가. 오는 날이 어느 땐고 樹欲靜而風不止하고 子欲養而親不待라 어느 때에 다시 볼고 春園에 滿發 花草 봄소식에 동생 생각 夏節炎天 더운 날에 細雨비에 동생 생각 九州丹楓 휘날릴 때 落葉聲에 동생 생각 엄동설한 찬바람에 白雪비에 생각이라 어느 何時 다시 볼고 영상靈床에 술을 부어 혼을 慰勞할가 애재라 오늘밤 靈座下, 신주 아래에 우리 여러 조카 哀哭聲 하건마는 대답한 말 전혀없네 듣는잇까 보는잇가 한 잔 술을 부어 보아도 구나줄 줄 모르오니 자시는 줄 어이 알고 회포를 다하자면 滄海水로 硯水라도(창해수를 연수로 써도) 먹물 말라 못하겠네 夜色은 히미하고 三更은 재촉하니 靈床을 우러러 보니 月色은 히미하고 행운은 구불구불 哭不盡言이며 文不盡言이라 불매한 尊影은 아시는가 모르신가 동생 悲悲 哀哉 格事 尙饗
이 글은 ‘영양 천공 소상지일야라’에서 천씨千氏 집안의 제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천씨’는 단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곧 본관이 潁陽 하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남동생이 67세에 유명을 달리 한 것이니, 이 제문을 쓴 주인공은 67세 이상의 할머니일 것입니다. 아마 70이 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 누나는 문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2남 2녀의 어머니가 되었고, 4남매를 모두 성혼시켰습니다. 남동생은 이씨 가문의 사위가 되어 4남 2녀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되어도 남동생이 먼저 간 사실에 대해 애통해하는 장면이 읽는 사람의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간곡하게 썼습니다. 남동생의 장사를 지내고 시집으로 돌아가는 심정을 ‘피눈물를 압치마에 다마 안고 친택으로 도라가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지나도 남동생을 생각하는 것을 “봄에 피는 화초를 보고도 동생 생각, 여름 더운 날에 내리는 세우비에도 동생 생각, 가을에 단풍 휘날릴 때에도 동생 생각, 겨울 엄동설한 찬바람에 흰 눈이 내릴 때에도 동생 생각춘원에 만발 화초 봄소식에 동생 생각 하절 염천 더운 날에 세우비에 동생 생각 구주 단풍 휘날일 때 낙업성도 동생 생각 염동설한 찬바람에 백설비에 생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문장을 꾸민들 이렇게 애절하게 꾸밀 수 있을까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그대로 진솔하게 썼기 때문에 이러한 문장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축년에 썼으니 1913년일 것 같지만, 표기법상 ‘아래아’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1913년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니 1973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한글 제문을 쓴 분이 거의 60대 말에서 70대 초일 것이니 그 표기는 20세기 초의 것으로 판단해도 좋을 것입니다.
2. 여동생이 오빠에게 올린 제문
유세차 경년 팔월 초사일 을묘일 매제 아산 쟝실은 오라버님 소상 제젼에 두어 자 글과 한 잔 술로 고하노니 통하고 절통할 남다른 우리 남매 억만 슬인 심즁소회心中所懷 자 업 나의 오 무엇으로 표시할고 오호 통제라 기년 팔월달에 당한 가화家禍 쳔지일월天地日月 혼동한 듯 참혹하고 애통한 일 오 젼 告하려니 가지가지 비참한 일 흉쟝胸臟이 막막하여 엇지 다 하오리가 오호 통며 오호 애제라 육십 노경老境 부모 앞前에 허무참상虛無慘狀 애통 상심 이문 가문李門家門<이씨 성의 가문> 우리 부모 만리장춘萬里長春 우리 형님 수복강영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태산갓치 바라다가 신수가 불길하여 촉시에 허몽虛夢이라 오호 통제 오호 통제 철이 성 어린 것들 처롭고 글이도다 애중한 우리 제아 다만 형제 위기타가 고적하게 혼로다 오호 통며 오호 라 원한 다수 우리 남형男兄, 오빠 객지 사업 하노라고 부모 동기 쳐 간 사시쟝쳔四時長天 이별하고 엄동설한 삼복더위 주야를 가림 업시 고생하시다가 한 번 성공 못 해 보고 한갓 포한抱恨,못 풀고서 젊은 청춘 장장長長 청년 무슨 모진 병이 들어 쳔지 약이 무효로다 삼신산三神山 불약不死藥을 인력人力으로 구할손가 통 절통 우리 오 탄생 시 명목名目이 그인가 오호 통라 지즁지 길너 주신 부모님게 휴로다 출가외인 딸식은 길너 주신 부모님게 효도 효심 못 불이고 동기간 못 즐기고 각각 츌가 흣터져서 그립다가 시시 상봉할지언정 북만산쳔北邙山川 가신 오 상봉할 길 영영 업서 비수悲愁 어린 제촉하 억수 통곡하오리가 오호 통 샹향.
이 제문을 쓴 여동생은 아산 장씨牙山 蔣氏 집안으로 시집간 사람입니다. 아마 오빠와 여동생 남매만 있는데, 오빠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고, 부모는 그대로 생존해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오빠는 객지로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하였는데, 부모가 60대일 때이니 매우 젊어서 부모보다 먼저 간 것입니다. 성공 한 번 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버린 오빠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나서 더욱 가슴 아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 제문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기해년 8월에 이 집안에 큰 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오빠가 ‘철이’와 ‘성자’ 남매를 두고 간 것 같습니다.
경자년은 1960년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1959년에 어떠한 일이 생겨 오빠가 어려운 일을 당했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저세상으로 간 오빠가 알고 있는 듯이 쓴 글입니다.
3. 아들이 어머니에게 올린 제문
유세차 무술 정월 병인삭 이십구일 갑오甲午은 즉 親堂, 친부모자주 孺人 金寧金氏 小祥之日也라 前日夕 癸巳에 불초자 기한은 근이 鄙薄之奠 재배통곡우 오호 애재며 오호 통재라 고어古語, 옛말에 하엿시되 至精無事, 일너시나 天地間에 불초한 자식 데여되어 자주 존영尊影 젼에 무삼 소회所懷 자아내여 多煩하게 고하릿가 천지가 剖判데여 억만 인생 생겨나서 선악善惡이 상반相反이라 어머니 착한 심덕心德 만단萬端으로 노력하와 자여子女들 생산할 졔 間三年에 년생緣生으로 생겨남하와 우리 팔남매를 잔밥잔식구에 무더 두고 금옥갓치 사랑하며 셜 츄석 명절 에 衣服 신발 곱기 입펴 남부렵기 기리실 졔 男耕女織,본업으로 남자는 글을 일켜읽혀 긔 姓名 긔록하여 先塋行化 이여 놋코 여자는 길삼시켜 본업에 종사하고 각각으로 치혼治婚할 졔 故家世族 빗난 문에 지琴瑟友之 성치成就시켜 말년영화末年榮華 바랬더니 가운家運이 否塞하와 우리 父主,우연 병셰 위즁하야 巫堂 頃刻 쓸데없고 千方萬藥, 無靈하와 월數月 신음타가 응급 별셰하시오니 일월이 무광無光하며 천지가 含黑한대 더우나 우리 母主 崩城之痛,당하시와 쳔추에 여한이라 셰월이 여류如流하와 三霜지낸 후에 설상에 가상으로 장정壯丁하신 우리 형님 우연이 득병하와 천방 만약 구원하되 백약이 無效하니 天命이 그인지 생전불호 기치놋코 홀연 별셰하시오니 堂上白髮 우리 母主 西河之慘< 부모가 자식을 잃은 참혹함>억울하다 그 중간 겪은 심회 엇지 다 말하릿가 넓으신 마음으로 고생을 영화로 생각하고 재쥬 형졔게 락을 붓처 주경야독晝耕夜讀 고훈敎訓하여 부급종사負笈從師<책 상자를 지고 스승을 따름>시기오니 말년자미末年滋味 혼자온닷 사람 생전 즐길 락자樂 별셰 사후 슬플 애자哀 자고이래 사람마다 상사喪事라고 하지마는 부모형제 친척 간에 별셰 날이 하직된니 존비귀천尊卑貴賤 물론하고 슬픈 정곡情曲, 간곡한 정 일반이라 오륜을 생각하고 이내 몸을 도라본니 애애哀哀하신 모주여 구로생육劬勞生育< 자식 낳고 기르는 수고>하실 적에 은공 놉아 하날이요 자정慈情 깁픈 바다이라 하날같치 높은 공과 바다같이 깊은 정을 호심孝心으로 갑사오며 정셩으로 갚아 낼까 그 은공을 갚을진대 割膚奉養< 양식이 부족해서 자신의 살을 베어서 부모를 봉양함> 부족이라 통재며 애재라 오늘밤 영혼 전에 오호 애재 통곡하니 呼天<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음>이 망극이요 일월이 무광이라 자고로 사람마다 별셰하면 다 이련가 작년 이 달 하신 말슴 어이 그리 못 듣는고 작년 이 달 보든 얼굴 어이 그리 못 보는고 부모된 그 자정은 별반이 厚薄慈主, 같은 그 자정慈情은 이 셰상에 누 잇슬가 다남애多男妹를 길러낼 제 자식에게 친 자정 열 손가락 한가지라 아들 딸 차등 업시 애지중지하신 자정 어이 그리 유달한지 이리 귀케 기러낼 제 요조숙녀窈窕淑女 자부子婦, 며느리 보고 군자호기君子豪氣 사위 보아 차례차례 성혼成婚하고 손부孫婦 증손曾孫 보고 백년 상수上壽 바랬더니 우연이 어든 병환 근근僅僅 해부하시드니 일조 일석에 홀련忽然 별셰하시오니 천지가 무너지고 일월이 무광이라 창천창천蒼天蒼天 이 무슨 변이리요 천도天道가 무심하고 신도神道가 무지無知튼가 염나왕이 무광턴가 강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합색이라 오호 통재며 오호 애재라 일차 왕림 바랫더니 금수셰게禽獸世界 보기 싫어 어느 곳을 향하시고 생리 백운白雲 높이 타고 지우제祈雨祭 행하시난가 공중에 구름 타고 신션 되러 가시넌가 춘산에 꽃 피여도 자주 생각이요 추야에 달 발가도 자주 생각이라 원수해 작년 차월 자주 가신 날을 날이 가고 달이 가매 어언간에 오는 세월 다 긴다시 일년 삼백육십일이 순시간에 다 지나고 어마주 소상일이 어언간에 다은지라 무정세월은 가도 다시 오것마은 애중하신 어마주여 가시드니 못 오신가 보고 지고 자주慈主 얼골 듯고 지고 자주 말슴 사생死生 길이 멀다 한들 어이 이리 못 오시요 황천으로 가는 길이 몇 달이나 머러건대 그 길로 가는 사람 가면 다시 못 오는고 원수로다 황천길이 원수로다 황천길만 업섯시면 애중하신 자주며 아무리 머려서도 맛날 곳이 잇지마는 예로부터 죽는 사람 황천길을 못 마가서 별세한 그날부터 영결永訣 종천終天 하직下直이라 만고 영웅 진시황도 통일천하 그 도량에 지우만세 바랜 마음 어이 그리 지각업소만은 서책書冊 불에 살 제 다른 서책 살지 말고 죽을 사자 사라시면 후천지에 나온 사람 죽지 안고 사라 보지 애고 답답 자모주慈母主여 어이 그리 못 오신고 골룡산곤룡산 높은 봉이 평지되여 오실나오 삼철리삼천리 약수 물이 육지되면 오실나오 슬프다 우리 자주여 야월공산夜月空山 깁흔 밤에 실피 우난 두견죠야 너는 무슨 한이 깁퍼 불여귀不如歸로 우름 우노 인생 금수 다를망정 심즁에 깁푼 한은 너와 나와 일바일반인가 너의난 고국故國 생각 나의난 친당親堂 생각 어이 그리 다 갓튼냐 우리 동기 팔남매가 어무니어머니 음덕陰德으로 부귀복록富貴福祿 누릴 줄노 누구 업시 밋슴니다 친외손親外孫이 흥성하야 어무니어머니 산소 압해앞에 친외손 느려서서 천추향화千秋香華 밧자오면 자주 사후복록死後福祿 그 안이 조흐릿가좋으리까 혼령이 생각하시고 아모조록 도으소서 지리한 심즁설화心中說話 저저히這這히, 있는 대로 낱낱이 다 하재면 의희한依稀한, 어렴풋한 황촉 하에 듯삽기 장황할 닷 대강 줄이고자 하오니 불매하신 존령尊靈은 근이 일배쥬一杯酒로 박薄하오나 서기 흠격歆格하옵소서 오호 애재 상
남자가 쓴 제문은 매우 절제되고 간결하여 짧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오히려 여자가 쓴 제문보다 더 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생각하기에 어머니의 한평생이 너무 기구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8남매를 낳았는데 그 동안 남편<제문 작성자의 아버지>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3년 뒤에는 맏아들까지 저세상으로 보냈을 때의 심정을 헤아려 되돌아보고, 그래도 남은 자식들과 여생을 평안하게 지내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홀연 세상을 하직하신 어머니의 일생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 제문을 쓴 아들의 이름은 ‘기한’입니다. 성은 알 수 없고 나이도 짐작할 수 없는데, 어머니는 김씨이고 본관은 김녕입니다.즉 김녕 김씨金寧金氏입니다. 형님이 먼저 돌아가셨는데 이 제문을 쓴 기한이란 아들은 맏아들이 아닙니다. 4남 4녀 중 둘째 아들쯤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제문에서 우리 서민들의 어머니들이 어떻게 자식 교육을 시켜 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주경야독, 즉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독서하는 것을, 여자에게는 길쌈 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들 서민들이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은 요조숙녀인 며느리를 맞고, 딸은 군자와 같은 사위를 맞이하여 친외손을 많이 보고 오랫동안 무병장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 문화재 속에 ‘수복강녕壽福康寧‘과 ‘부귀다남富貴多男‘이라는 글이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晦齋 이언적선생(1491년~1553년)은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유배된 1548년에 어머님 손씨가 별세하여 적소에 부음이 도달하자 통곡하며 서러워하고, 조석전을 올리면서 호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질인 이순임李純任으로 하여금 고향에 계시는 영위 앞에 제사케 하고 제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 한글은 한문을 번역한 것이며 ‘숙종 대왕 민비 제문’과 동일한 글씨로 쓰인 것으로 보아 한 집안에서 나온 것이고 역시 안동 지역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동지역에서 발견된 회제 이언적선생의 제문한글 번역문과 함께 보내는 "안동의 한글제문"은 홍윤표 교수의 기고문을 요약한 한글제문 소개글에다 몇편의 한글제문을 더한 내용이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