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改過遷善) - 지난날의 잘못을 고쳐 착하게 되다.
개과천선(改過遷善) - 지난날의 잘못을 고쳐 착하게 되다.
[고칠 개(攵/3) 지날 과(辶/9) 옮길 천(辶/12) 착할 선(口/9)]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과오를 저지른다. 그렇지만 자신은 잘못이 없이 완전하고, 남의 잘못은 針小棒大(침소봉대)하여 미주알고주알 나무란다. 남의 눈 티끌은 보여도 제 눈 들보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負荊請罪(부형청죄)의 소중함을 얘기했다. 과오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고치기까지 한다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桀王(걸왕)을 내치고 商(상)을 건국한 湯王(탕왕)은 과실이 있으면 즉시 고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改過不吝/ 개과불린)고 했고, 孔子(공자)도 잘못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고쳐야 한다(過則勿憚改/ 과즉물탄개)고 가르쳤다.
지난날의 과오를 고쳐(改過) 착한 사람이 된다(遷善)는 성어는 글자대로는 아니지만 여러 곳에서 비슷한 용례가 확인된다. 먼저 周易(주역) 하경 42괘인 風雷益(풍뢰익)에 나오는 ‘바람과 우레로 이루어진 것이 익괘의 상이니, 군자는 선함을 보면 곧 실행에 옮기고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쳐야 한다(風雷益 君子以見善則遷 有過則改/ 풍뢰익 군자이견선즉천 유과즉개)’라는 말이 가장 오래일 것이다.
唐(당)나라 재상을 지낸 문장가 陸贄(육지, 754~805)라는 사람은 임금에 상주한 글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의 글귀 중에 ‘지혜로운 사람은 허물을 고쳐 착하게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허물을 부끄럽게 여겨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智者改過而遷善 愚者恥過而遂非/ 지자개과이천선 우자치과이수비)’는 것은 오늘날 쓰이는 뜻과 유사하다.
이외에 직접 출처는 아니라도 예화에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 晉(진)나라 周處(주처)다. 그는 태수의 아들로 태어나 재주도 뛰어났지만 10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제멋대로 커 골칫덩이였다. 영특하고 힘이 좋아도 남을 괴롭히는 데만 사용해 마을 사람들은 그를 호랑이, 교룡과 함께 三害(삼해)라 부르며 멀리 했다.
주처가 자라면서 차차 철이 들어 사람들이 왜 자신을 멀리 하는지 물어보니 삼해 때문이라 했다. 이에 주처는 믿음을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악전고투 끝에 맹호와 교룡을 처치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미심쩍어 완전히 마음을 열어주지 않자 잘못을 고치고 새 사람이 되겠다며 길을 떠났다. 東吳(동오)지역의 대학자 陸機(육기), 陸雲(육운) 형제를 찾아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얘기를 하며 도움을 청했다. 육운이 충고한다. ‘옛사람들은 아침에 허물을 들었으면 저녁에 뉘우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네(古人貴朝聞夕改/ 고인귀조문석개).’ 주처는 앞날이 밝다는 말을 듣고 이후 10여 년 동안 학문과 덕을 익혀 마침내 대학자가 되었다. 唐太宗(당태종)이 房玄齡(방현령) 등을 시켜 펴낸 ‘晉書(진서)’에 실려 전하는 이야기다. / 제공 : 안병화(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호접지몽(胡蝶之夢) - 나비에 관한 꿈, 物我一體(물아일체)의 경지, 인생의 덧없음
[되 호(肉/5) 나비 접(虫/9) 갈 지(丿/3) 꿈 몽(夕/11)]
두 쌍의 커다란 날개를 휘저으며 바쁘게 꽃 사이로 드나드는 조그만 곤충, 나비는 예로부터 많이 민요로 불렸고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묘사했다. ‘예쁜 것도 찾고 향기로운 것도 찾으며, 한가한 것 같기도 하고 바쁜 것도 같네(尋艶復尋香 似閒還似忙/ 심염부심향 사한환사망)’라고 노래한 唐(당)의 시인 鄭谷(정곡)도 그 중 하나다. 이런 작품 외에 잘 알려진 것이 나비효과다. 기상관측 때 처음 이야기됐다고 하는데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남 변화를 몰고 왔을 때 자주 인용된다.
성어 중에서는 나비의 꿈인 莊子(장자) 이야기가 유명하다. 장자는 이름이 周(주)로 史記(사기) 老子韓非(노자한비) 열전에 소개되어 있다. 孟子(맹자)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으로 벼슬길에 들지 않고 은거하면서 저술에 전념했다. 학문은 老子(노자)를 근원으로 物我(물아)가 동등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無爲自然(무위자연)을 주창했고 재미있는 우화를 많이 등장시켰다. 호랑나비인 蝴蝶(호접)으로도 쓸 수 있는 이 말은 ‘장자’ 齊物論(제물론)에 나온다. 부분을 인용해 보자.
‘장주가 나비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만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부지주지몽위호접여 호접지몽위주여 주여호접 즉필유분의 차지위물화).’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깬 뒤,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호랑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 데서 彼我(피아)의 구별이 안 되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됐다. 나아가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한 가지 작은 계기가 큰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은 검은 유착에서도 볼 수 있었다. 나비효과나 장자의 나비와는 관련이 없어도 작은 사건에서 번지는 것이나, 작은 욕심에서 비롯돼 평생 공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면 덧없기도 하다. / 제공 : 안병화(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