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객령공계 대종회/자유게시판

2013년 성균관 추기석전 대제(5월11일)

임홍규 2013. 5. 14. 03:02

 

                   春  期  釋  奠                                        孔夫子誕降2564年                                                                                                                                                                           

 

 

 

 

 

 

 

 인사말 (成均館長 職務代行     躍)

 

 孔夫子 誕降(탄강)2564年 春期釋奠에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沈滯 를 거듭했던 儒敎가 21세기 들어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中國에서는 儒敎復興의 바람이 불어 論語에 관한 여러 종류의 서적이 베스트

셀러의 首位를 차지하고 있고. 중국정부가 나서서 孔夫子 誕降日을 기념하고 성대한 으례

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심장부인 天安門 廣場 옆에 五千年 중국 文化의 상징으로 거

대한 孔夫子象이 세워진사실이 中國에 있어서의 儒敎의 現 地位를 雄辯하고 있습니다. 大

陸으로부터 불어오는 儒敎 復活의 滔滔(도도)한 흐름에 우리도 同參해야 합니다. 오랜守舊

를 탈피하고 적극적으로 시대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理念을 제시함으로서 사회를 이끄는 主

流思想이 되어야 합니다.※

 유교는 원래 個人보다는 共同體를 우선하며. 家庭에서 출발하여 世界萬邦으로 外廷을 넗

히는 思想이기 때문에 사회적 兩極化로 심화된 對立과 葛藤을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孔夫

子를 위시한 39위 聖賢이 바로 이러한 道를 실현하기 위해一生을 바친 분들입니다.

 오늘 成均館과 全國 鄕敎의 文廟에서 봉행하는 釋奠의 意義는 慣例的인 祭儀의 답습이

아니라 先聖 先賢의 遺志를 받들어 그 理想을  반드시 실현시키겠다는 覺悟를 다지는 것입

니다. 우리 儒林이 이러한 時代的 使命을 自覺하고 社會的 變革을 能動的으로 主導할 때 斯

文振作과 儒敎復興이란 遠大한 目標가 실현될 수가 있다.

 다시 한 번 자리를 빛내주신 내외 귀빈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孔紀2564(2013)年 5月11日 成均館長 職務代行  魚  躍(약)  拜上

 

 

 

성균관 (成均館) 史蹟 第143號

 현 위치에 성균관이 건립된 것은 1398년(태조 7년)이다. 그러나 1400년(정종 2년)에 화재를 입어

1407(태종 7년)에 재건되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1년(선조 34년)부터

1606년에 걸쳐 원형대로 중건하였고. 영조(英祖) 때에 완비되었으며. 1869년(고종 6년)에 수리가 크게

이루어졌다. 성균관에는 주건물로서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페를 모신 대성전(大成殿) 및

동. 서무(東. 西무)가 있으며. 유생(儒生)들의 학업장소였던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부속건물로서 기숙

사였던 동. 서재(東.西齋)와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식당인 진사식당(進士食堂)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묘 일원의 면적은 12.261평에 이른다.

 

 

성균관(成均館)의 역사(歷史)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교육기관은 372년애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다. 이곳에서 경전읽기를

비롯하여 활쏘기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때 전통적인 유교교육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經典)을 기르쳤으며. 신라에서도

역시 682년에 국학(國學)을 세워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92년에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단계별로 교육하였다.

국자감에서는 경전교육과 더불어 유교의 창시자인 공부지를 추모하고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이 행해졌다. 국자감은 이후 국학(國學) 또는 성균감(成均監)등으로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어오다가 공민왕 11년(1356)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으로 정해진 이후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

지고 있다. 고려 때까지 개성에 있던 성균관은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139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서 유교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 갈 인제의 양성. 풍속의 교화 등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걷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은 일제(日帝)의 침략으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합병한

일제는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합병 직후 성균관을 페지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다.성균관을 페지한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치하고. 성균관을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성균관을

재건하고 유교를 부흥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전국 유림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어 1946년에 유림의

뜻을 모아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석전(釋奠)

 

석전은 전통적으로 나라에서 주관하던 의식의 하나로 옛날부터 학교에서 선성과 선사들께 드리던 제사

의식이며. 유교의 창시자이자 만세종사(萬世宗師)이신 공부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인과 현인들을 추모하고 그 분들의 위대한 덕을 기리기 위한 행사이다.

 지금부터 2.562년 전에 탄생하신 공부자께서는 인간 사랑의 정신인 인(仁)의 실천을 통해 인격을 완성

하셨고.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우셨으며 예의(禮義)의 회복을 통한 도덕적 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해 헌신

하셨다. 공부자의 유교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공부자의 제자 등 성현들의 은덕에 감사하고 경모하며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유교와 유교 사상의 발전을 위하여 더욱 헌신하겠다는 다짐으로 매년 봄. 가을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234개 향교(鄕校)에서 동시에 석전(釋奠)이 봉행된다. 현재 문묘(文廟)에는 공부자를

비롯한 다섯 분의 성인과 우리 나라의 현인 18位. 그리고 중국의 현인 16位 등 모두 39位의 위패가 모셔저

있다.

 우리나라의 석전의 역사는 1600여 년 전인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372)에 최초 의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설립될 때 석전도 함께 봉행되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시대에는 국학(國學)에 문묘를 모셔놓고 석전을 봉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국립

대학이던 성균관(成均館)에 문묘를 모시고  더욱 큰 규모로 확대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석전을 봉행.

현재까지 이어져오고있다. 역사적으로 뿌리를 같이하는  태학이나 국학. 성균관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한민족의 정통대학으로 유교를 교육이념으로 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온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석전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이미 그 원형을 상실하여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1986년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 전국에서 약 5~6백여명이 참석 1시간 반정도 제향을 마치고 진사각에서 점심식사하고 혜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