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객령공계 대종회/판서공파

판서공 휘 명산 묘갈명

임홍규 2010. 9. 15. 14:35

 

 

판서공 휘 명산 묘갈명

(判書公諱命山墓碣銘)

 

 

안성(安城)고을 동면(東面) 모산동(茅山洞) 건좌(乾坐)의 원(原)에 사척(四尺)의 높이로 대(對)한 것은 일보국숭록대부 행(逸輔國崇祿大夫 行) 이조판서(吏曹判書)인 임공(林公)의 옷과 신을 감춘 곳으로 전후(前後) 두 부인(夫人)을 아울러 합폄(合窆)하여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쌓았다. 인조 병자난(仁祖 丙子亂) 뒤에 또 화(禍)를 만나 불행(不幸)히 실전(失傳)되어 임문호(任文鎬)라는 자(者)가 국내(局內)에 입장(入葬)하였는데 송사(訟事)가 늙어 해가 오래도록 파내지 못했다가 철종경신(哲宗庚申)년에 비로소 산지(山地)를 도로 찾아 관가(官家)에 정장(呈狀)하여 입안(立案) 판결문(判決文)을 내었으니 그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소 앞에 옛 부터 표석(表石)만이 있고 비각(碑刻)이 없어서 지금 그 후손들 일종(一宗)이 의논을 같이하여 좋은 돌을 깎아 산소에 세우고자 순각(淳珏). 병천(炳千) 두 분을 보내어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請)하니 내가 그만한 사람이 아니므로 사양하다 마지 못하여 삼가 상고하여 서술(敍述)한다.

임씨(林氏)는 처음에 은(殷)나라 태보(太保)인 휘(諱) 팔급(八及)이란 분이 기자(箕子)를 따라 동국(東國)에 나와서 평택(平澤)땅에 살았으므로 자손(子孫)이 그대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이래로 잠조(簪組)(벼슬)가 대(代)를 이어 휘(諱) 세춘(世春)이 있으니 벼슬이 세자 전객령(世子典客令)이요. 휘(諱) 재(榟)를 낳으니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요. 휘(諱) 태순(台順)을 낳으니 벼슬이 사복사윤(司僕寺尹)이요.

휘(諱) 정(整)을 낳으니 비로소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청백이(淸白吏)에 뽑혀 시호(諡號)가 공혜공(恭惠公)이니 곧 공(公)의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부(祖父)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주한씨(貞夫人 淸州韓氏)니 예조판서(禮曹判書)인 광한(光漢)의 따님으로 三子를 두었으니 공(公)이 그 둘째인데 生. 卒은 모두 전(傳)하지 않았다.

공(公)의 처음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파평윤씨(貞敬夫人 坡平尹氏)니 지훈연원사(知訓鍊院事)인 이(彛)의 따님이요. 계배위(繼配位)는 정경부인 경주김씨(貞敬夫人 慶州金氏)니 유성(由性)의 따님으로 모두 三南二女를 낳았다.

맏아들은 수창(壽昌)이니 병조참판(兵曹參判)이요. 둘째 아들은 수장(壽長)이니 문과곡산부사(文科谷山府使)요 .

끝의 아들은 수정(壽廷)이니 증산현령(甑山懸令)이요. 맏딸은 덕수 이삼기(德水李三奇)에게, 둘째 딸은 판서(判書)인 풍산장계증(豊山長繼曾)에게 출가했다. 손자에 있어 병조판서 충정공(兵曹判書 忠貞公)인 규(珪)와 및 부제학(副提學)으로 증령의정(贈領議政)인 홍동(洪泂) 진예군(進禮君)인 이(李) 형(衡) 현령(縣令)인 유종호(柳宗灝)에게 출가한 딸은 맏아들이 낳았으며, 문한림(文翰林). 도승지(都承旨)인 찬(瓚)과 성균사마(成均司馬) 생원진사(生員進士)인 종(琮)과 및 최자준(崔自浚)에게 출가한 딸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도승지(都承旨)인 조()과 및 채 재(蔡 載)에게 출가한 딸은 끝의 아들이 낳았다.

증현손(曾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하나 칠대손(七代孫)인 경업(慶業)은 절도사(節度使)로 증좌찬성충민공(贈左贊成忠愍公)이니 정충대절(貞忠大節)이 화이(華夷) 중화 호이(中和 胡夷)에 저명(著名)하여 충주 충열사(忠州 忠烈祠)에 향사(享祀)되었으며, 충민공(忠愍公)의 형(兄)인 맹산현감 승업(孟山縣監承業)과 증지평 형업(贈持平亨業)과 아우인 귀성부사 준업(龜珹府使俊業)은 함께 충효(忠孝)로써 혹은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고 혹은 정려(旌閭)에 명(命)했으니 可히 公의 덕(德)이 두터워 빛이 흐름을 보겠다.

저으기 생각하건대 公의 시대(時代)에 국가(國家)가 승평(昇平)하고 사류(士類)가 배출되었는데 公이 명가(名家)에 생장(生長)하여 순미(純美)한 재질(才質)로써 학문(學問)의 功이 있어 태종 세종(太宗 . 世宗)의 두 성조(聖朝)를 만나 위계(位階)는 일품(一品)에 오르고 벼슬은 대총재(大冢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니 그 이름난 언론(言論)과 아름다운 사적(事蹟)이 가(可)히 나라에 보답(報答)하고 세상에 모범(模範)될 것이 마땅히 많을 터인데 병화(兵火) 나머지에 유적(遺蹟)이 없어져서 전(傳)함이 있지 않으니 애석(哀惜)하도다.

또는 국조(國朝)에서 징사(徵士) (隱逸은일 선비)를 중(重)히 여기어 가벼히 천(薦)에 뽑지 않았는데 公이 특히 은일(隱逸)로 소명(召命)을 받아 쓰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 실력(實力)이 없고서 되겠는가

公의 산소 내백호백보허(內白虎百步許)인 건좌(乾坐)의 원(原)은 公의 장자(長子)인 참판(參判)의 묘(墓)로써 원배(元配)는 합폄(合窆)하고 계배(繼配)는 부좌(祔左)로 쌍분(雙墳)하여 완연(宛然)히 평석(平昔)의 가까이 모신 것과 같으니 아! 공경하겠도다.   드디어 명(銘)으로써 이어 이르기를.

혁혁(赫赫)한 세덕(世德)이 족보(族譜)에 서로 바라보이네

公이 그 서업(緖業)을 이어서 글이 있고 도(道)가 있도다.

공혜공(恭惠公)의 착한 아들이요 충민공(忠愍公)의 어진 조상(祖上)일세

일찍 은일(隱逸)의 천(薦)을 받아 천조(天曹) 이조(吏曹)의 장(長)이 되었네

후손(後孫)에게 덕(德)을 심어주어 이미 번성하고 창대(昌大)하도다

우뚝한 저 백성(白城) 안성의 고호(安城의 古號)은 公의 감추운 곳일세

내가 이 비석(碑石)에 명(銘)을 하여 그 숨은 빛을 발휘(發揮)하였으니 천만년(千萬年)이 내려가도록 감(敢)히 훼상(毁傷)하지 말기를

 

 

                                         단군기원(檀君紀元) 四千三百十四年 신유중춘(辛酉仲春)에

 

 

                                                      光 山  金容駿(김용준)은 撰함